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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속의 폭력

기사승인 2018.03.09  00: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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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셀비 스퐁 감독의 『The Sins of Scripture』를 읽고

미 성공회 소속 은퇴 감독인 스퐁의 저서 여럿이 ‘한국기독교연구소’를 통해 한국말로 소개되었다. 그중 가장 최근 만난 것이 바로 『성경의 시대착오적인 폭력들』이란 제목으로 출간된 이 책이다. 가장 급진적인 영국 성서신학자 존 로빈슨의 제자답게 스퐁 역시 성서에 대한 이해가 과격하다.

이 경우 ‘과격’은 필자에겐 긍정적 의미를 뜻한다. 성서 66권을 신적 계시의 닫힌 공간이라 우기며 기독교를 시대착오적으로 만드는 보수 근본주의자들과 맞설 수 있는 강력한 이론을 제시하는 까닭이다. 그럴수록 『성서의 죄들』이란 책 제목의 불온함에 마음이 보태진다.

폭력과 증오를 낳았던 성서 속 본문들을 파헤치고 쓰여 진 시대적, 상황적 한계를 적시하며 이를 폐기코자 한 것이다. 이런 작업을 통하여 스퐁 감독은 기독교를 폭력(죄)으로부터 구원코자 하였다. 그의 다른 책 『기독교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라는 것이 이점을 보여준다.

1.

이 책은 스퐁이 감독직을 은퇴한 이후 쓰여졌다. 비교적 시간도 여유롭고 교회권력과 이격된 자유로운 상태에서 집필된 책이다. 물론 현직에 있을 때에도 그는 논쟁을 피하지 않았다. 『신에게 솔직히』란 그의 스승 책이 그렇듯이 스퐁 역시도 성서연구에 있어 과감했고 솔직했다. 기독교를 미래의 종교로 만들고자 항시 신학적 엄밀성을 유지한 결과이다.

주지하듯 ‘한국기독교연구소’는 10년 전 선보인 이 책을 종교개혁 500주년의 해인 2017년 재출간 하였다. 종교개혁 신학 전통이 금과옥조로 삼은 ‘오직 성서’의 본뜻을 옳게 알릴 목적에서이다. ‘오직 성서’가 근본주의적 문자주의와 공명하는 현실에서 사람잡는 기독교적 정체성을 폭로, 수정코자 하였다. 필자 역시 이런 뜻에 부응코자 지난 해 본 책을 다시 읽었고 이렇듯 재정리하고 있다.

하지만 필자가 스퐁 감독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때론 ‘과격’이 파격으로 치닫는, 또 다른 의미의 극단적 견해를 피력하는 탓이다. 예컨대 마리아를 예수의 부인으로 묘사하는 것이나 바울 사도를 동성애자로 추정하는 것은 과(過)하다. 후술하겠지만 동성애 옹호를 위해 바울을 그렇게 이해하는 것은 극단주의의 또 다른 유형일 수 있다.

그럼에도 전반적으로 필자는 스퐁 감독의 성서관을 긍정한다. 그의 글에서 많은 해방감을 느꼈고 성서가 상상력의 보고(寶庫)라는 평소의 생각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가 스퐁 감독의 솔직한 용기와 맞닥뜨릴 수 있기를 희망하며 본 책 내용을 소개한다. 본 책 제목을 영어 원제처럼 『성서의 죄들』이라 해도 좋았을 뻔 했다.

2.

저자 스퐁은 본 책에서 성서 속의 폭력적 구절들에 주목하며 하느님 이름으로 행해진 악행들을 열거하였다. 그는 성서 속의 ‘끔찍한 구절’들이란 표현을 자주 썼다. 성서가 또 다른 차원에서 악의 근원이 되었던 탓이다. 성서가 편견을 뒷받침하고 폭력을 은폐시키는 경우는 다반사였다.

하지만 저자는 성서의 오남용 차원을 넘어 성서자체가 평화의 적(敵)이란 생각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성서에 근거한 종교적 독선들이 교회 내에 만연했기 때문이다. 주지하듯 유대인에 대한 적대, 가부장주의, 동성애 혐오, 반(反)생태적 기독교 나아가 이웃종교의 부정 등이 바로 성서 본문에서 비롯했다. 이런 식의 적대, 혐오, 부정, 반대가 ‘오직 성서’ 속에 함축된 개신교적 에토스(원리)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성서가 하느님 말씀이란 것이 무슨 뜻인지 되묻고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타자 부정을 통해서만 자기 정체성을 얻는 기독교, 성서가 정말 이런 기독교를 뒷받침하고 부추기는 것인지를 말이다. 지금껏 권력과 권위를 추구했던 서구적 기독교는 성서를 배타적으로 오용했다. 하느님을 새로운 방식으로 만났던 예수의 길을 잊은 결과이다. 예수 안에서 작동한 하느님의 현존을 묻는 새로운 시도가 필요한 시점에 이르렀다고 확신했다. 말했듯 『기독교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란 이전 책도 그래서 나온 것이다.

본 책은 4-5가지 영역에서 성서의 이름으로 행해진 악행을 서술하였다. 생태학, 여성(가부장주의), 동성애, 반유대주의, 종교적 배타성 등의 주제가 그것이다. 이 모든 영역들에서 성서는 끔찍한 악행을 저질러 온 것이다. 종래의 잘못을 단절시키려면 성서가 계시가 아니라 서사시적 역사(Epic History)임을 인정하라고 했다. 히브리 성경의 형성사(史)를 유대인들의 신앙적 관점에서 제대로 배우라는 것이다.

이 주제를 다루는 마지막 장에서 우리는 성서를 대하는 옳은 인식과 태도를 배울 수 있다. 여기서 예수의 하느님 이해는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유대 서사시의 틀에서 예수를 이해하는 새로운 시각을 배울 수 있다. 한마디로 예수는 기독교라는 종교 틀 속에 갇힌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3.

생태학자 린 화이트가 말했듯이 기독교는 반(反)생태적 종교로 낙인찍혀 왔다. ‘생육’과 ‘번성’의 종교, 땅을 지배하는 종교, 하느님 형상을 닮은 유일한 존재인 인간에게 여타 생명체를 다스리는 권한이 부여되었다는 성서 말씀(창 1:26-28) 탓이었다. 하지만 지금 세상은 이런 기독교적 가치로 인해 사실적 종말의 위기에 처해있다. 이점에서 저자는 ‘생육과 번성’을 하느님 말씀이라 여기지 않았다. 이를 기록한 사람들은 바벨론 포로기의 제사장(P문서)들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포로 생활을 하고 있으나 자식을 많이 낳아 민족 숫자가 불어나면 언젠가는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으로 ‘생육과 번영’을 선포한 것이다.

하지만 70억 명이 넘는 사람들을 목하 지구 생태계가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오히려 가족계획이 필요한 시점이 된 것이다. 따라서 종래와 같은 ‘생육과 번성’은 더 이상 하느님의 축복(말씀)일 수 없다. 더구나 바알 신(神) 정복에서 보듯 땅 정복을 미덕으로 알던 유대전통을 이은 기독교는 지속적으로 땅을 멸시해왔다. 하지만 땅의 부정성에 기초한 무분별한 개발로 인간은 지구의 보복적 역습에 처했다. 성서가 불량신학을 낳았고 그것이 다시 환경을 파괴하는 불량 이데올로기를 확대 재생산시킨 결과이다.

이와 같은 생태위기의 핵심을 스퐁은 필자도 동의하는 바, 유대-기독교적 신관에서 찾았다. 세상을 초월한 인격신론(Theism)은 예수의 인성을 대폭 축소시켰고 세상 밖의 초월을 궁극본향으로 여기도록 했기 때문이다. 이런 인격적 초월신관은 항시 세상(땅)과 대극적 관계를 맺었다. 지구가 우리들이 살 집이란 생각을 부정했고 약화시킨 것이다.

그러나 인격신론은 그 자체로 하느님이 아니라 그에 대한 인간적 정의(定義)일 뿐이다. 하느님은 초자연적 존재로서가 아니라 모든 것에 넘쳐나는 생명력으로 존재하는 분이다. 성서는 이를 성령이라 일컬었다. 진화론과의 공명을 위해서라도 하느님은 세상 밖 인격이 아니라 생명체 안에 내재하는 힘으로 고백되는 것이 좋다.

따라서 저자는 인격신론과의 단절을 반(反)생태적 삶을 정당화시킨 오류를 벗는 지름길로 여겼다. 더욱 과격하게는 인격신론을 파괴되어야 할 우상이라 역설한 것이다. 그 자리에 존재의 근거,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말하는 ‘좋은 신학’이 들어설 것을 기대하면서 말이다.

4.

결혼식 주례 때마다 종종 여자가 남자의 갈비뼈로 만들어 졌다는 사실이 강조, 회자되곤 한다.(창 2:18-23). 여자는 남자와 달리 하느님 형상(창 1:26)대로 창조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암묵적으로 전제한 것이다. 여자는 오직 남자를 돕는 짝으로 여겨졌을 뿐이다. 오히려 여자를 악의 근원이라 생각한 적도 많았다. 남성선호, 여성혐오 즉 가부장적 성차별의 출처가 첫 번째 성서, 창세기에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그러나 교회 밖에서 누가 이런 사실을 믿고자 할 것인가? 이를 하느님 말씀이라 강조할 경우, 교회는 더욱 낯선 공간이 되고 말 것이다. 하지만 가부장제도가 하느님 뜻이자 그의 말씀으로 여겨진 긴 세월을 살아왔고 지금도 그 영향사(史)는 지속되고 있다. 이천년 역사 속에서 기독교는 여성에게 사제직을 허용치 않았다. 피를 흘리는 여성 몸으로는 결코 감당할 사역이 아니라 본 것이다. 레위기 도처에 기록되었듯이(레12:15, 18:19) 생리(生理)하는 여성은 항시 불결했고 그자체로 죄인으로 간주된 탓이다.

그렇기에 예수의 처녀 탄생 설을 강조, 유포했으며 부활의 첫 증인 된 마리아(마리아 복음서)는 부정하면서 예수 어머니 마리아는 숭배했다. 가부장 체제하에서 처녀(동정녀)와 무성(無性)인 어머니로서의 여성만 긍정된 것이다. 중세 역사 속에서 능력 있는 여성을 악마시한 마녀재판이 성행한 것도 여성을 악의 출처, 그 화신으로 본 까닭이다. 어떤 연유로든지 여성이 남성보다 우월할 수도, 해서도 아니 되었다.

여기서 저자는 남근숭배를 말한 통상적 심리학자들 의견을 뒤집고 여근숭배를 말한다. 피에 대한 남성들 공포가 할례의식의 동기였다는 것이다. 피란 본래 죽음을 상징하는 바, 피를 흘리면서도 죽지 않고 생명을 영속하는 여성들을 보며 이런 갈망으로 피 흘리는 할례를 시작했다고 했다. 할례를 통해 여성의 생리적 능력을 얻고자 했으나 정작 생리 중인 여성들을 부정하게 보면서 여성을 보호대상으로 여겼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그러나 여성에 대한 상반된 이해도 성서에 존재한다. “그리스도 안에 남자와 여자도 없다”(갈3:26-28)는 말씀이 바로 그런 류(類)이다. 가부장적 편견을 부수기 위한 바울의 피나는 노력이 갈라디아서에 가장 잘 나타나있다.

이미 예수의 행적에 동일 정황이 포착된다. 예수의 몸에 향유를 뿌려 몸을 닦은 여성의 이야기는 가부장적 유대관습에 대한 반역이자 혁명이었다. 여성 활동의 한계를 깨트렸고 사회적 장벽을 허물었기 때문이다. 예수 앞에서 남자도 여자도 없고 새로운 인간성만 드러날 뿐이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를 예수의 아내로 보는 저자의 시각을 동의하고 싶지 않다. 예수를 평생 동안 좇았던 마리아, 분명 시대를 거스른 용기 있는 존재라 하겠으나 그로써 예수의 아내가 될 필연적 이유도 없을 듯싶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목하 교회가 여전히 ‘성서의 죄’, 곧 끔찍한 성서 언어를 근거로 폭력을 되풀이 말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5.

지금 한국교회는 동성애 문제로 시끄럽다. 과거 종북/좌빨 이념을 적으로 만들더니 얼마 전부터는 동성애를 적대시함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내세우고 있다. 성서가 동성애를 거부하고 정죄한다는 이유와 근거를 갖고서 말이다. 창세기 19장, 레위기 18-20장 그리고 로마서 1장 등의 본문에서 반동성애 출처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이 구절들이 하느님 말씀일 수 없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그렇기에 동성애 용납을 기독교 몰락의 최후 단계라 여기며 동성애와의 신경질적인 투쟁을 시작한 한국교회에게 저자는 ‘어리석다’ 말할 것이다. 동성애를 현실 그대로 인정치 않는다면 기독교의 미래가 없다고 결론지은 까닭이다.

저자는 어떻게 이렇듯 단언할 수 있었을까? 주지하듯 앞서 언급한 레위기 본문은 바빌론 포로기 시절 함께 잡혀간 제사장들의 기록(P문서) 중 일부이다. 낯선 땅에서 유대적 주체성을 위해 그곳(바빌론)과의 차별적 삶이 필수적이었다. 안식일을 지키고 율법을 존중하며 할례를 행하라는 성결법전이 그래서 만들어졌다. 차별이야말로 포로기의 생존을 위한 전략이었던 것이다. 남자들끼리의 동성애적 행위를 금하는 것 역시 이런 선상에서 이해될 일이다.(각주 1) 반면 여성간의 동성애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봐서 레위기 저자는 이점을 몰랐을 것이라고 스퐁은 추정한다.

이런 일을 지켜야 본토 귀향을 하느님이 허락할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성적 지향이 다른 소수자들과 공존하고 있다. 왼손잡이가 있고 빨강머리 소유자가 있듯이 동성애 성향 역시 소수자로서 존중받을 수 있어야 한다.

『원복(Original Blessing)』의 저자인 매튜 폭스(Fox)는 동성애 문제를 성서적 자구가 아니라 과학적 사실로 수용하라고 했다. 인간을 비롯한 동식물 세계 속에 10퍼센트 안팎의 이런 소수자들이 존재하는 탓이다. 하여 성서를 인용하여 성적 소수자들을 배척하고 정죄하는 것이 더 큰 죄악임을 강변했다.

동성애 금지를 기독교 정체성의 근거로 삼는 것을 스퐁은 하느님 신앙 본질 자체의 파괴라 여겼다. 그렇기에 폭력의 근거로 오용되는 레위기 본문을 이제는 폐기해도 좋다고 말한다. 당시 상황에선 필요했겠으나 새로운 의식이 발생하는 오늘의 시점과 불통하는 까닭이다. 동성애를 정죄하는 기독교인들을 향해 스퐁은 “그리스도를 따를 것인가? 아니면 동성애 혐오증이란 편견을 고수할 것인가?”를 물었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바울의 로마서 속에 동성애를 금하는 명백한 언사가 있기 때문이다. 레위기의 증언은 그렇다 하더라도 동성애에 대한 바울의 정죄를 피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내린 징벌로 여기는 로마서 속 바울의 동성애 혐오증은 어찌 이해해야 옳을까?

저자 스퐁은 여기서 바울을 동성애자로 추정한다.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자신의 내면적 갈등을 당시 율법에 저촉되는 동성애 성향 탓으로 본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선이 아니라 원치 않는 악을 행한다고 했을 때 그 모순의 실체가 바로 동성애란 사실이다. 율법을 통해 바울은 자신의 성향을 통제코자 했으나 거듭 실패했다는 것이 스퐁의 생각이다.

하지만 바울은 그리스도안 사랑에서 우리를 내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고백했다. 동성애조차도 말이다. 이것이 그리스도가 자신을 구원했다는 바울의 회심체험이었다. 율법이 해결치 못한 자신 속 모순, 동성애 성향을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이 구했던 까닭이다. 이제 바울은 더 이상 자신을 억압하고 살지 않아도 되었다.

여기서 저자 스퐁은 기독교인들에게 다시 묻는다. 그리스도를 따를 것인가? 아니면 동성애 혐오증의 노예가 될 것인가를. 여기서 동성애를 수용하는 스퐁의 입장은 긍정하나 바울 자신을 동성애자로 추정하는 스퐁의 시각에는 동조하기 어렵다. 얼마든지 상이한 신학적 해석이 있는 탓이다.

6.

신약성서 안에서 우리는 반유대주의 본문들을 많이 접한다. 바리새인을 비롯하여 서기관, 율법학자들을 부정적으로 여기는 이야기들로 성서가 채워져 있다. 여성신학자 R.류터는 『형제살인』이란 책에서 복음서 기자들이 의도적으로 반유대적 성향을 갖고 문서를 기록했다고 적시하였다.

종교개혁자 루터를 거쳐 홀로코스트를 일으킨 히틀러에 이르기까지 반유대주의의 기독교적 기원이 이처럼 복음서에 이른다는 사실이 놀랍다. 이는 초대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인 된 유대인들과 본래적 유대인들 간의 갈등이 깊었음을 반증한다. 초기 유대적 기독교인들도 기원후 8-90년 시점까지 유대 회당을 출입하였다. 이곳에서 기독교인들은 히브리적 성서의 맥락에서 예수를 이해 읽고 해석했던 것이다.

그러나 점차 기독교는 유대적인 것 전체에 대해 극단적인 혐오를 갖게 되었다. 이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이 유대인들 탓(마 27:25)이란 마태의 증언에서 비롯했다. 이후 기독교인들은 유대인을 게토 화시켜 죽음으로 몰아넣는 범법자들이 되고 말았다.

스퐁은 예수 죽음의 원인을 유대인에게 돌린 이 성서구절 만큼 폭력적인 것이 없다고 하였다. 이 구절 이상으로 ‘성서의 죄’를 비극적으로 드러낸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유대인들은 보고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혼미한 영의 소지자, 즉 반(反)기독교적 존재로 낙인찍혀 살아야만 했다.

불행히도 성전파괴 후 정통 유대인들은 오히려 성서와 율법에 고착된 교조주의적 입장을 취했다. 동시에 예수를 추종한 수정주의자 기독교인들은 이런 유대인들 탓에 자신들이 로마로부터 고통을 당했다고 믿었으며 자신들이 정통파 유대인과 다른 존재인 것을 말하기 시작했다. 로마의 집정관인 빌라도에게 면죄부를 주었고 로마를 자신들 친구처럼 여겼으며 유대적 사유체계를 뛰어넘는 방식으로 예수를 설명한 것이다.

이렇듯 반유대주의 경로가 성서 속에 이미 굳게 자리하고 있었다. 루터가 유대인을 개, 돼지 보다 못한 존재로 여겼고 히틀러가 이를 근거로 유대인 600만 명을 학살한 것 역시 이런 성서 구절에서 비롯했다. 그렇기에 저자는 반유대주의를 기독교의 본질이라 증거 한 성서본문들을 폐기하라 했다. 인류 역사상 가장 큰 범죄를 야기시켰던 까닭이다. 그래서 이보다 더 큰 ‘성서의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있었다.

7.

기독교의 배타성, 유일무이한 진리관 역시 이런 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겠다. 성서 속의 배타적 증언들이 정통 유대인들과 수정주의 유대인들, 즉 기독교인된 유대인들 간의 차열한 갈등과 다툼의 상황에서 나왔다는 사실이다. 이후 기독교의 교리화 과정이 수백 년에 걸쳐 지속되었으나 이경우도 교회 내부의 투쟁, 흥정, 타협의 산물인 경우가 많았다.

흔히 배타적인 증언들은 ‘...이다’와 같은 명제적 진술로 나타난다. 몇 문장으로 신적 신비(계시)를 표현하고 전달하려는 시도였다. 이런 명제적 진술, 즉 교리를 갖고서 교회는 내부적으로는 확실성과 열심을 강요했고 외부를 향해서는 늘상 불관용했다.

하지만 저자 스퐁은 기독교가 교리를 갖고 확실성을 주장하는 순간 악마적으로 변한다고 경고한다. 파괴적인 개종전략과 제국주의적 선교가 바로 그 실상이다. 여기서 영성과 근본주의의 대별이 중요하다. 전자가 의식적인 친밀감을 들어낸다면 후자는 무의식적 소유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하느님 혹은 신비마저도 자신의 소유로 삼고자 하는 것이 교리를 앞세우는 근본주의의 특성이라 했다.

스퐁은 성서 속의 교리적 경향을 요한 복음서에서 찾는다. ‘나는 ...이다’라는 명제적 진리를 가장 많이 담고 있는 탓이다. 말했듯이 저자는 그 이유를 이 복음서가 기록된 역사적 정황에서 찾았다. 성전파괴와 함께 유대가 멸망한 후 이스라엘 사람들은 율법(토라)을 강조하며 근본주의자들로 변해갔다. 그렇기에 예수전승을 유대 신앙전통과 연결시키려 했던 수정주의파 유대인들에 대한 관용을 거두었다. 이들로 인해 율법의 완전성이 훼손되는 듯 보였던 것이다.

이런 갈등 상황에서 수정주의자들 역시 정통주의자들을 공격했다. 이들은 예수를 율법의 처음인 모세보다도 심지어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보다 앞세웠고 급기야 예수를 하느님(말씀)과 등가로 여긴 것이다. 이런 연유로 요한서는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자 없다’는 배타적 구절들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명제적 진술들을 애용했다. 예수를 통해서만 유대인들의 하느님에게로 가는 길이 있다고 정통유대인들을 공격한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이 본문들은 오늘 날처럼 이웃 종교를 부정하는 차원에서가 아니라 정통 유대인들을 넘어서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소수자의 위치에 있던 기독교가 다수자, 곧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배타적 교리로 오용되고 말았다. 요한복음의 본문들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타자 부정적인 종교적 제국주의를 낳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그렇기에 저자는 이런 본문들 탓에 세상이 불행하다면 차라리 지우는 것이 낫다고 말한다. 종교 없는 기독교의 길을 가자는 것이다. 그럴수록 저자는 예수를 만나 자신들 삶을 변화시킨 성서 속 인물들의 예수이해를 강조한다.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인 탓이다. 이런 기독교를 이웃종교들 역시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최초의 복음서인 마가의 다음 기록이 그래서 중요하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막 9:40).

8.

이제 본 책의 마지막에 이르렀다. 여기서 저자는 성서를 명제적 진리로서가 아니라 유대민족의 역사적 서사시로 읽을 것을 종용한다. 그리스 세계의 『일리아스』, 『오뒷세이아』에 해당되는 것이 히브리 성서 속 4개의 큰 문서들-J문서, E문서, P문서 그리고 D문서-이라 하면서 말이다. 한마디로 성서란 유대민족이 창작한 민족사이지 신적 영감으로 기록된 천상의 책이 아니란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의 『천부경』, 『삼일신고』 등도 의당 이 반열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들 역시 종전처럼 더 이상 배척과 폄하의 대상일 수 없다. 여하튼 저자는 상술한 유대적 서사시들인 네 문서의 빛에서 예수를 이해하는 새로운 시각을 열어 젖혔다.

먼저 J문서는 특별한 정황에서 유대민족의 신앙적 기원을 서술한 것으로 히브리 성서를 구성하는 최초의 요소이다. 다윗, 솔로몬 시기의 저술로서 인간의 죄 성과 하느님의 절대성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의 특별성을 강조하였다. E문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여타 민족들과 통합되는 과정에서 생성되었다. 출애굽의 사람들과 광야 유목 민족과의 합류과정의 산물인 것이다. 하느님과 모세의 관계를 중시한 J 문서와 달리 하느님과 백성들 간의 계약을 더 중시하였다. 남 왕국 유다 보다는 북 왕국 이스라엘의 가치를 더 많이 수용한 결과였다.

신명기 문서로 알려진 D문서는 유대인들의 정치적 불행이 하느님에 불복종 탓이란 사관을 정초했다. 하느님 신앙의 회복만이 민족의 살길 인 것을 강조했고 율법에 대한 청종을 신앙의 핵심이라 여긴 것이다. 이에 근거하여 후대에 요시아 왕에 의한 종교(예배)개혁이 시도 되었다.

마지막으로 포로기 중 쓰여 진 P문서가 있다. 이시기에 유대인들은 자신들 서사시를 다시 써야만 했다. 낯선 환경에서 그곳 백성들과 차별적으로 살기 우한 몸부림이 요청된 탓이다. 창세기 1장의 우주 창조의 대서사시를 비롯하여 레위기 성결법전이 완성된 것도 이 시점이었다.

이렇듯 4문서에 대한 설명을 통해 저자는 성서가 부족에서부터 인류 보편적으로 확대되는 유대인의 대서사시인 것을 재차 강조하였다. 이를 통해 자신들 과거를 기억했고 현실에 저항했으며 다가올 미래를 기대할 수 있었다. 이런 4문서에 시대적 정황에 따라 예언서, 성문서, 묵시록 등의 장르가 보태진 것이 바로 구약성서였고 예수의 이야기가 이에 접목되어 해석된 것이 신약성서, 곧 복음서들이다. 유대인들의 서사시에 예수의 독특한 하느님 체험을 합류시켜 유대인 이야기를 더욱 보편화시킨 것이 바로 기독교란 말이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유대적 서사시도 기독교적 교리도 아니고 예수의 하느님 경험 그 자체이다. 어떤 하느님 체험이 예수를 예수로 살게 했는지를 물어야 한다. 예수가 전한 하느님 나라는 유대적 서사시를 넘어서 있다. 동시에 그것은 기독교적 교리와도 무관하다. 오히려 저자는 하느님 나라를 보편화되고 인간화된 새로운 서사시라 말했다. 인간의 비전을 고양시키고 부패된 상상력을 치유하며 새로운 인간성을 탄생시키는 새로운 경험(영성)의 보고(寶庫)란 것이다. 이를 통해 ‘호모 사피언스’인 인간은 ‘호모 스피리투스’로 진화할 책임이 있다.(각주 2) 이것은 트랜스 휴먼, 포스트 휴먼의 선상에서 말해지는 ‘호모 데우스’와는 크게 다르며 달라야 할 것이다.

예수는 기독교란 종교를 넘어 인간을 영적 존재로 이끄는 새로운 인간성의 첫 열매인 까닭이다. 그렇기에 이 예수와 더불어 새로운 보편적 서사시를 써가는 것이 우리들의 과제가 되었다. 다석 유영모의 말대로 미완의 원고지를 채울 책임(未定稿)이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인 것이다.

(각주 1) 반면 여성간의 동성애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봐서 레위기 저자는 이점을 몰랐을 것이라고 스퐁은 추정한다.
(각주 2) 이것은 트랜스 휴먼, 포스트 휴먼의 선상에서 말해지는 ‘호모 데우스’와는 크게 다르며 달라야 할 것이다.

이정배 ljbae@mtu.ac.kr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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