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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서로 다른 복음(福音)(사 40:1-11, 막 1:1-8)

기사승인 2017.12.13  23:4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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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제의 복음과 예수의 복음

화약고에 불을 붙이다

트럼프는 지난 주 러시아 연계로 자신의 측근과 아들의 이름이 계속 언론에 떠오르자 국민들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갑작스레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한다고 하는 일방적인 정치 선언을 함으로 중동의 화약고에 불을 붙였습니다. 충분히 예상된바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물론 중동의 여러 국가들에서 저항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벌써 몇 사람이 희생당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48년 유럽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 영국과 프랑스 미국에 힘입어 나라를 세웁니다. 자신들의 나라가 과거 이곳에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팔레스타인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조상대대로 최소 이천년 이상 살아오던 땅에서 쫓겨나는 일이 생긴 것입니다.

유대인들 주장의 근거는 성서입니다. 조금 있다 살펴보겠지만, 성서는 유대 민족의 땅문서가 아닙니다. 설사 땅문서가 된다 하더라도 법적인 의미에서는 50년 이상 누군가가 살았다면 살아온 그 사람에게 점유권이 있는 법입니다. 물론 당시 유엔은 땅을 둘로 나누어 그곳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두 나라를 세우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동의할 리가 없습니다. 애시 당초 말이 안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천년을 살아오던 땅을 빼앗기는 것도 억울한데, 땅을 나눌 때에도 불공평하게 했기 때문이다. 주민은 자기들이 더 많은데, 땅은 이스라엘에게 더 많이 준 것입니다.

그래서 팔레스타인들이 거부를 한 상태에서 1967년 6일 전쟁을 통해 이스라엘은 아예 팔레스타인 지역의 땅까지 모조리 자신들의 통치지역으로 만들어버리고 나서 끊임없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집을 부수고 올리브나무를 베고 그곳에 이스라엘 정착지를 만들어왔습니다. 그리고는 이제는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규모 시멘트 장벽을 곳곳에 만들어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이동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예를 들면 서울에서 대전까지 가는 거리인 곧 예루살렘에서 헤브론까지 가족을 만나러 간다고 할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두시간만에 가지만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약 삼십 개의 검문소를 통과해야 하는데, 사흘이 걸립니다, 사실상 도시와 마을을 모두 절단시키고 말았습니다.

유대인들도 물론 나라 잃고 외국으로 떠돌아다니면서 나라 없는 백성으로 고생도 많이 했고, 히틀러 독재 때에도 6백만이라는 종족 학살도 당했습니다. 그렇다면 아픔을 겪은 사람으로 아픔을 겪는 사람의 아픔을 이해하고 함께 살아가고자 해야 하는데, 미국의 무력을 바탕으로 그냥 무참히 짓밟고 있습니다. 

저의 기독교 신앙에 따른다면 오늘날 야훼 하느님이 관심하고 사랑하시는 민족은 유대 민족이 아니라 팔레스타인 민족입니다. 설사 그들 가운데 10%만이 기독교인이고 나머지 90%가 예수는 많은 예언자 중의 한 사람이요 참 예언자는 알라라고 주장한다 하더라도 내가 믿는 야훼 하느님은 혈통을 중시하는 하느님이 아니라 약자, 눌린 자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

유대 민족의 뿌리는 모세와 함께 애굽을 탈출한 히브리 족속입니다. ‘히브리(≪하삐루)’라는 말은 당시 사회에서 노예, 혹은 떠돌이와 같이 뿌리 뽑힌 사람들을 일컫는 사회적 용어였습니다. 신명기 26장을 보면 가나안 정착이후 유대인들은 성전에 가면 이렇게 고백해야 했습니다.

“제 선조는 떠돌며 사는 아람인이었습니다. 그는 얼마 안 되는 사람을 거느리고 애굽으로 내려가서 거기에 몸 붙여 살았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불어나 크고 강대한 민족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애굽인들은 우리를 억누르고 괴롭혔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하느님 야훼께 부르짖었더니 야훼께서는 우리의 아우성을 들으시고 우리를 구출해 내시어 이 땅으로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그때 야훼께서는 사제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너희와 너희 집에 주신 온갖 좋은 것을 먹으며 즐겨라. 너희뿐 아니라 너희 가운데 있는 레위인과 떠돌이도 함께 즐기도록 하여라.” 오늘의 떠돌이는 집도 빼앗기고 땅도 빼앗기고 권리도 복지도 빼앗긴 팔레스타인들입니다. 야훼 하느님은 저들이 믿는 모세 오경 말씀을 통해 분명하게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함께 기쁨을 누리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들은 더 이상 야훼를 따르는 이들이 아닌 것입니다.

참 이스라엘은?

창세기에는 형제 얘기가 많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이스마엘과 이삭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이삭의 계보로 시작한다면, 모슬렘 사람들은 아브라함-이스마엘로 계보를 시작합니다. 이삭이 정실의 자식이라는 주장은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이지, 이슬람 성서인 쿠란에는 그런 내용이 없습니다.

이삭에게는 에서와 야곱이 있었습니다. 에서는 당시 유대 왕국과 이웃하고 있던 에돔 왕국의 시조입니다. 오늘날의 팔레스타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혈통으로 말하면 중동사람들은 모두가 한 조상에서 나왔습니다. 그것이 창세기의 가르침입니다. 형제라는 것입니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레위기의 말씀이나 예수님의 말씀에서 이웃은 옆집에 사는 사람이 아닌 바로 다른 부족과 다른 종족을 두고 한 말입니다. 그런데 아담의 첫 아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살해하였듯이 형제 살해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한반도에 사는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남에는 북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북쪽 형제들은 미국에 대해서는 증오를 품고 있지만, 남쪽 형제에 대해서는 우리와 같은 극도의 증오심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기원은 이렇습니다. 형 에서를 속여 장자의 축복권을 빼앗았던 야곱이 20년만에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형을 만나기 전 얍복강가에서 야훼의 보호를 간절히 간구하면서 얻은 새 이름입니다. 그 뜻은 ‘신과 씨름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곧 야곱이 이스라엘로 그 이름이 바뀐 것은 이후 자신의 여생은 야훼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몸부림치며 살아가겠다는 결단의 고백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이스라엘은 단지 국가의 이름일 따름이지, 본래 신과 씨름하는 자로서의 이스라엘의 의미를 상실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신의 뜻을 물으며 눈물로 기도하는 사람들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야훼 하느님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사회적 약자들의 아픔에 함께 하면서 이들을 짓누르는 사회 불의에 저항하라고. 지금의 국가 이스라엘은 핵무장 국가로서 그 땅에 2천년을 대대로 살아온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이방인 취급하여 생존의 권리를 모두 빼앗아 갔습니다. 성서의 용어로 본다면 저들은 오늘의 애굽이고 바빌론이고 로마 제국입니다.

오히려 팔레스타인들이 성서가 말하는 히브리인들이요 이스라엘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성서를 제대로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성서적 관점을 더 확대하여 본다면 오늘의 미국의 군사패권주의로 말미암아 고통 받고 있는 북조선과 이라크와 시리아와 예멘의 백성들 또한 오늘의 히브리인들인 것입니다.

인과율(因果律)?

오늘의 본문이 시작하는 이사야 40장과 앞서 39장까지는 그 내용과 문체가 확연히 다릅니다. 저자가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40장부터 55장까지를 제2 이사야라고 부릅니다.

제1 이사야는 아시리아 제국의 침공 위협과 바빌론 제국에 의한 예루살렘 함락과 포로시기에 쓰였습니다. 지배자들의 죄를 폭로하고 심판을 선언합니다. 제2이사야는 페르시아 제국에 의해 바빌론 제국이 멸망당하면서 유대백성이 해방 받는 얘기로 시작합니다. 그래서 서두부터 제2이사야는 이렇게 외칩니다.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위로하여라. 너희의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이제 너희의 복역기간이 끝났다고, 그만하면 벌을 받을 만큼 받았다고,”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고통을 당하면 그건 죄로 인한 벌이라고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돈 많고 건강한 사람들이 의인이기에 그런 것은 아니지요.

물론 우리는 고난이나 고통을 당할 때에 내가 무슨 잘못이 있는 것인가 하는 자기 성찰이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이를 죄로 인한 하느님의 형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성서가 말하고자 하는 신앙이 아닙니다. 죄와 벌이라는 인과관계는 인간의 사고 형태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법칙과 사고를 넘어 활동하시는 분이십니다.

2004년 인도네시아에서 쓰나미가 일어나 이십만 명 이상이 죽음을 맞았습니다. 그때 대형교회 목사들이 말하기를 예수 안 믿어서 그렇다고 했습니다. 일본에서 지진과 쓰나미가 일어나 만 명 이상이 죽임을 당하자 일부 정신 나간 목사들이 또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지금 미국 캘리포니아에 엄청난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5만 채 이상의 집이 불에 탔습니다. 기적이 일어나 엄청난 비가 내리지 않는다면 얼마나 더 계속될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매년 이런 일이 반복되었지만, 올해 같은 참사는 처음입니다. 이것도 예수 안 믿어서 일어난 일입니까?

절이 불에 탔다면 그렇게라도 우기겠지만, 교회가 불에 탄 것도 예수 안 믿어서 그렇게 된 겁니까?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하지만, 남의 불행을 그렇게 말하는 것은 예수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몰상식한 발언입니다. 의인이라도 고통을 당합니다. 예수님도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성서는 왜 의인이 고통을 당해야 합니까? 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는 책입니다. 대표적인 책이 욥기입니다. 우리는 악의 근원을 사탄이라고 말하지만, 욥기에 그려진 사탄은 천사와 같은 등급의 영적 존재로 천상의 각료 회의에서 하느님이 욥과 같은 의인은 없다고 칭찬하자, 그렇다면 한번 제가 그를 시험해보아도 좋겠습니까? 라고 제안을 하는 일종의 껄끄러운 유혹자로 등장합니다. 여기에 하느님은 스스로 한 말로 인해 어쩌지 못해, 그러나 욥이 사탄의 시험을 이겨낼 것이라고 하는 희망을 안고 허락을 합니다. 악의 정체 혹은 악의 근원을 밝히는 일은 절대 선을 표방하는 유일신 신앙으로는 풀어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악이란 선의 모자람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거스틴이 했다고 하지만, 이는 욥기 저자의 견해이기도 합니다. 성서는 야훼만이 유일한 참 신이라고 주장합니다. 그 근거는 무엇인가요? 다른 신보다 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가요? 물론 갈멜산 위에서 보여주는 야훼의 힘은 바알과 아세라 신이 하지 못했던 불을 내렸습니다. 신을 힘에 비교한다면, 야훼를 따랐던 유대 민족은 중동의 최강국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힘에 있어서는 애굽에 밀렸고, 아시리아에 밀렸고, 바빌론에 밀렸고, 페르시아에 밀렸고, 로마에 밀렸습니다. 그들의 믿는 하느님 야훼의 성전은 끊임없이 약탈당하고 파괴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유일신의 의미를 재정립해야 합니다.

유일신이란?

십계명은 다른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첫 번째 계명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다른 신들의 존재를 인정합니다. 다만 그들을 섬기지 말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왜 야훼만을 섬겨야 하는 것입니까? 그건 십계명의 머리말에 있습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느님 야훼니라.’ 야훼는 종, 노예들의 신이지, 노예 주인들의 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야훼 신의 위대한 점은 우월한 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빼앗긴 자, 눌린 자들과 함께 아파한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야훼는 다른 신과 구별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유일신 개념은 여기에 근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신들을 부정한다고 해서 부정되는 것입니까? 오히려 그 부정이 인류 역사에 수많은 전쟁을 불러 일으켜오고 있습니다.

야훼는 자기를 찾는 유대인이라 하더라도 강자를 행세하고 약자들의 아픔을 외면했을 때, 언제나 심판을 경고했습니다. 예언자들의 일관된 외침입니다. 지금 모든 교회들은 야훼를 고백합니다. 그러나 사회적 약자와 함께 하지 않는 교회는 야훼 이름을 본 딴 유사 홈피와 같습니다.

은행 홈피도 잘못 들어가면 유사 홈피로 들어가 사기를 당합니다. 요즘 비트코인 값이 천정 지부로 뛴다고 하니까 유사 홈피가 판을 치고 있는데, 사기를 당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야훼를 믿으면 부자가 되고 강한 자가 된다고 가르치는 교회는 유사 홈피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언자 이사야는 오히려 “모든 인생은 한낱 풀포기, 그 영화는 들에 핀 꽃과 같다. 풀은 시들고 꽃은 진다. 스쳐가는 야훼의 입김에 백성이란 실로 풀과 같은 존재이다.”라고 경고하며 겸손하게 처신 할 것을 요청합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는 박근혜와 최순실과 김기춘과 우병우와 원세훈과 김관진과 이명박의 영화가 어떻게 시드는지를 잘 보고 있습니다. 한때 하늘의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큼 권세를 누렸지만, 지금은 모두 감옥에 가 있거나 감옥행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신의 심판이자 역사의 심판이자 정의의 심판이자 촛불의 심판입니다. 그간 블랙리스트에 올라 억눌림을 당한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이런 것이 기쁜 소식 곧 복음입니다.

두 개의 서로 다른 복음(福音)

복음서 중 가장 먼저 쓰인 복음서는 마가복음입니다. 오늘의 본문 마가복음 1절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의 시작.” 그러고는 문장이 끝납니다. 복음의 시작은 ‘다음과 같다’라는 형용사나 동사가 없습니다. 일종의 불완전문장입니다.

마가가 이렇게 쓴 이유는 1장 2절로 16장 마지막 절까지가 모두 예수에 관한 복음의 내용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어느 한 구절, 어느 한 사건이 복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자체가 곧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표현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천년 전 팔레스틴 지역에 살던 사람들에게 이 구절은 생소한 구절이 아닙니다. “신의 아들 아우구스토스가 전해온 복음” 이 구절은 로마에서 발굴된 이천년 전 기념비에 새겨진 글입니다. 로마 황제 아우구스토스의 본래 이름은 옥타비아누스입니다. 아우구스토스는 그의 이름이 아니고 그의 지위에 관한 명칭인데 그 뜻이 바로 신의 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대담하게도 마가라는 사람이 예수의 죽음 이후 40년이 지난 약 70년경 예루살렘 성이 로마군에 의해 철저하게 무너져 내려 앉는 것을 보면서 예수에 관한 이야기를 글로 엮어내면서 세간에서 쓰고 있던 정치적 용어인 ‘복음’이란 단어를 활용한 것입니다.

당시의 복음, 희랍어로 ‘유앙겔리온’은 로마 황제가 전쟁에서 승리하고 나서 로마의 시민들에게 승리 소식과 함께 수많은 약탈품과 노예 포로들이 선물로 곧 도착할 것을 알리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러나 갈릴리 민중과 같은 피압박민들에게 있어서는 이는 결코 기쁜 소식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가는 갈릴리 민중들의 해방을 위해 애쓰다 결국은 로마의 십자가 형장에서 사라진 예수 그리스도를 (참) 복음이라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복음이라는 단어를 재수용하는 것은 곧 예수가 그랬듯이 로마 황제의 통치를 부정하는 혁명 정치 선언이었던 것입니다.

마가는 이어 예수의 길을 준비하는 사람으로 세례 요한을 말합니다. “요한은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두르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으며 살았다.” 세례 요한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에 보다 자세히 설명이 나오지만, 마가는 그의 배경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 다만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준비하는 사람으로만 소개가 됩니다.

그런데 그를 소개하는 ‘광야, 낙타 털옷, 가죽띠, 메뚜기와 들꿀’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당시 사람들은 즉각 8백년 전에 살았던 전설적인 인물 엘리야를 떠올렸습니다. 세례 요한 그는 엘리야의 재현이었던 것입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이 가장 부강했던 때, 아합 왕과 이세벨 왕후의 부당한 권력에 목숨을 걸고 저항함으로 야훼 하느님의 승리를 보여주었던 모세에 버금가는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의 제자 엘리사가 쳐다보는 가운데 불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은 때가 되면 엘리야가 다시 와서 이 세상을 바르게 정리할 것이라고 믿어 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례 요한의 주위로 몰려들었습니다. 바야흐로! 때가 찼다고 본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자기는 저들이 기다리던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자기보다 훌륭한 사람이 뒤에 오는데, 자기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기조차 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그분은 성령으로 베푸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물과 성령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신유와 방언을 강조하는 교회들은 성령세례를 강조합니다. 물세례를 받고 교인이 되었는데, 그러면 성령 세례를 다시 받아야 하는 것일까요? 분명히 말씀드리자면, 목사들이 세례를 베풀 때에 물을 머리에 뿌립니다. 물세례 맞습니다. 그러나 그때 목사님들은 그 세례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베풉니다. 곧 성령세례입니다.

세례 요한에게 있어서 물세례와 성령세례가 구분이 되었지만, 예수 그리스도 이래로 이는 하나가 되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여기세 ‘성령과 불’이라고 하여 ‘불’이 첨가됩니다. 그러자 교인을 현혹하는 목사들이 이제는 ‘불세례’를 들고 나왔습니다. 뜨거워져야 한다.

그러나 불은 조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불은 뜨거운걸 넘어 모든 걸 태우기 때문입니다. 남한교회가 너무 불을 좋아하다가는 재만 남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마태가 불을 언급하는 것은 요한의 물세례는 불완전하지만, 예수에 의한 성령세례는 완전한 것임을 강조하기 위하여 말하는 것이지, 이를 꼭 마음이 뜨거워지는 신비 체험으로 확대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예수께서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을 때에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오셨다.” 비둘기는 평화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당시 멀리 떨어진 사람들끼리의 의사소통 방식이었습니다. 곧 세례를 통해 하늘의 사명이 이 땅의 예수에게 임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를 강조하는 물세례와 다른 점입니다.

대림절 둘째 주일입니다. 아기 예수를 기다린다는 말은 달력을 바라보면서 25일을 기다린다는 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시는 길을 준비하는 삶을 말합니다.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 것일까요? 예수께서는 세례를 받으신 후 천사의 인도하심을 따라 광야로 가서 40일을 거합니다. ‘40’이라는 숫자와 ‘광야’는 모두 하느님의 임재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광야의 히브리어는 ‘므드바르’인데, ‘므’는 장소접두어이고 ‘드바르’는 하느님의 말씀 역사를 뜻합니다.

광야는 도시의 저편입니다. 도시는 인간의 문화가 만든 편리와 향락이 있는 곳입니다. 편리에 빠지면 노예와 마찬가지의 삶이 이어집니다. 애굽을 탈출한 노예들이 광야생활을 하면서 뭐라고 불평합니까? 애굽에는 고기도 있었고 채소도 있었다고 말합니다. 먹고 입는 것만 관심하는 것 그게 바로 노예생활입니다.

광야로 나아간다는 것은 불편이 따르지만, 그러나 자유인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편리함이 주는 노예의 삶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자유인의 삶을 선택할 것인가? 이는 우리의 선택입니다.

마가 시대에도 로마 황제의 복음을 따르는 자들과 예수의 복음을 따르는 자들로 구분이 되었습니다. 대다수는 편리를 좇아 도시의 큰 길을 선택했고, 오직 소수의 사람들만이 좁은 광야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여러분의 삶에 성령의 인도하심이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조헌정 choshalom@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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