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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의 웃음 (창세기 21:6-7)

기사승인 2017.10.15  01:2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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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모든 복

6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7 또 이르되 사라가 자식들을 젖먹이겠다고 누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으리요마는 아브라함의 노경에 내가 아들을 낳았도다 하니라

자녀의 복

오늘 저희가 읽은 본문은 누구나 잘 아시는 사라가 이삭을 낳았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지금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30대 후반의 가장이라는 입장에서 보았을 때에 이 시대에 있어서 더 이상 자녀를 잘 낳는다는 것은 복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녀 계획을 하고 계신 분들에게 임신을 큰 축복이지만, 지금 시대의 많은 젊은 사람들은 차마 자녀를 갖지 못하고 있는 것도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오늘 드리려는 말씀은 자녀의 복이라는 관점에서, 자녀를 낳게 된 사라가 복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오히려 사라가 진정으로 받게 된 것이 이삭이라는 아들 하나뿐이었는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계약

우리가 먼저 생각해 볼 것은 이삭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들입니다.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에게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고 하실 때에는 그 복에 대한 조건이 있습니다. ‘이러이러하면 내가 너에게 복을 주겠다.’ 라는 약속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계약입니다. 12장에서 처음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맺은 계약은 약속된 땅으로 가라는 것이었고, 하나님께서는 이에 대한 복으로 ‘큰 민족을 이루는 복’,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 그 복을 전하는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 Jan Provost, Abraham, Sarah, and the Angel, 1520s, Oil on wood, 71 x 58, Musée du Louvre, Paris

13장에 가서 아브라함과 룻이 서로 갈라지면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의 내용이 조금 상세해집니다. 자손이 티끌같이 되어서 민족을 일으킬 것이고 아브라함이 서 있는 땅을 그에게 주시겠다는 복의 약속이었습니다. 13장에서 복의 내용이 상세해진 이유는 계약의 내용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처음의 계약은 가나안으로 가라는 것이었고 지금은 이 땅에서 하나님을 섬기라는 내용으로 바뀌었기에 받게 될 복도 변하였습니다.

이런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의 계약이 15장에 가서는 완전하게 계약의 형태를 갖추게 되고, 하나님께서는 더 구체적인 복을 약속하시는데, 아브라함의 종, 다메섹 엘리에셀이 아닌 진짜 자식을 통해서 민족을 이루겠다는 약속입니다. 여기까지의 내용에서 그 자식이 사라와의 자식인지, 하갈과의 자식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아브라함은 하갈과 자식을 가지라는 사라의 요청에 순순히 따랐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브라함과 하갈 사이에서 이스마엘이 태어난 이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또 한 번의 새로운 계약을 맺으십니다. 그것은 할례입니다. 하나님을 따른다는 믿음의 징표가 할례이고, 할례의 의식을 행함으로 인해서 아브라함은 새로운 복을 약속받습니다. 그 새로운 복이 아브라함과 사라의 아들 이삭입니다.

두 가지 웃음

이삭의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곳은 17장 19절인데, 하나님께서 왜 이삭이라는 이름을 주셨는지 성경에는 명확하게 나타나있지 않습니다만, 대략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져왔고 성경에는 그 두 가지가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전되어 온 두 가지 중 무엇이 진짜냐의 문제는 우리에게 크게 의미가 없을 듯 하기에 두 가지 이야기를 다 보려고 합니다.

첫째는 사라가 아들을 낳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아브라함이 웃은 것이고, 둘째는 아들을 낳으리라는 천사의 말에 사라가 웃은 일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100세 언저리였기 때문에 두 사건이 다 맞는 전승이고 둘 다 웃었을 가능성이 커 보이기는 합니다. 오늘 저희가 생각해보려고 하는 점이 바로 이 웃음입니다. 아브라함이 웃었든 사라가 웃었든, 둘 다 웃었든, 이들의 웃음은 비웃음에 가깝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비웃었다고 하면 왠지 신성모독 같게 느껴지기 때문에 비웃음에 가깝다고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나이 먹은 사람이 어떻게 아이를 갖냐는 비웃음이 이 둘이 보인 웃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참 얄궂게도 그 ‘비웃음’을 아들의 이름으로 지정하십니다. 요즘에는 그런 아이들이 많이 없습니다만, 저희 바로 아래 또래 때까지만 해도 부모님들이 특이하게 아이 이름을 지어주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뭐라고 예를 들진 않겠지만 특이한 이름들이 많았고 개명하는 사람들도 참 많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이삭이라는 이름도 딱히 좋은 이름은 아닙니다. 우리들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생각해왔지만, 이 이름은 결국 부모들이 하나님을 비웃었다는 의미를 가진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삭에게 이런 이름을 지어주셨을까요?

이삭의 뜻

사실 이삭이라는 이름의 뜻은 ‘웃었다’가 아닙니다. ‘웃게 될 것이다’입니다. 이삭이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짜하크에서 나온 말로, 짜하크는 그대로 번역하면 ‘그가 웃다’라는 동사입니다. 히브리어는 동사의 기본형은 과거, 현재, 미래로 나뉘지 않고 완료와 미완료로 나뉩니다. 이미 실행된 것과 실행될 것으로 나뉩니다.

짜하크를 실행될 형태인 미완료로 변환하면 이짜하크, 이짜크 가 되는데, 번역하자면 ‘그가 웃을 것이다.’가 됩니다. 그렇기에 아브라함과 사라가 창세기 17장과 18장에서 웃었기에 이름이 ‘이삭’이 되었다는 점은 ‘이삭’이라는 이름의 본래 뜻과 맞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의 아들에게 이삭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신 데에는 그들이 웃게 될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의 비웃음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웃음을 얻게 되리라는 뜻입니다. 이 점을 생각하시면서 오늘 저희가 읽은 본문에서 사라의 모습을 보았으면 합니다. 사라는 분명 이삭을 낳으리라는 예고를 들었을 때에 웃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또 웃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웃음은 전혀 다른 웃음입니다. 처음의 웃음을 콧방귀에 가까운 비웃음이었고, 지금의 웃음은 참을 수 없는 감격에 의한 웃음, 자신이 지금까지 고민해왔던 모든 것이 사라져버리는 웃음, 그저 기쁨밖에 없는 웃음입니다.

그렇기에 사라는 6절에서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라고 말합니다. 옆에 있는 사람까지도 함께 웃게 만드는 웃음, 그것이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복이었습니다. 이 복은 단지 나의 고민이 사라지는 것을 넘어서 다른 이들의 고민까지도 사라지게 만드는 웃음입니다.

이 웃음의 순간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처음 말씀하셨던 복, 12장 3절에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라’의 말씀이 이루어진 순간입니다.

이삭을 통한 하나님의 뜻

여기에서 한 가지 더 의미를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이삭’이라는 이름을 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지금까지 우리는 그저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에나, 천사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 웃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삭이라는 이름을 주셨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의미라면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삭의 이름은 ‘이’가 빠진 ‘자크’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이 내리시는 진정한 복을 일깨워주고 싶으셨습니다. 그들이 조금이라도 알게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들이 복을 포기하지 않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지금 비웃음을 띄고 있는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역설적이게도 ‘너희가 웃을 것이다’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이삭이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들은 웃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위해서 노력하십니다. 깨닫지 못하는 우리들이 당신이 주시는 복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노력하시고 또한 그 노력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복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작은 징표를 주십니다. 이삭의 이름을 내리신 것처럼 작은 징표들을 주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노력마저도 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단순하게 아브라함과 사라가 웃었으니까 이름이 이삭이라고 생각해왔던 것처럼, 우리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노력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과거형으로 치부해버리거나, 비웃음거리로만 생각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를 위해 수고하시며 노력하시는 하나님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참된 웃음을 주시기 위해 노력하시는 그 분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께서도 진정으로 웃으시게 될 것입니다.

복을 받는 방법

이러한 복, 우리는 어떻게 받을 수 있겠습니까? 믿음은 이런 복을 받는데 필수 조건이 아닙니다. 이삭을 약속 받았을 때에 아브라함도 믿지 않았고 사라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이스마엘이라는 자식을 낳았습니다.

믿음보다는 하나님 앞에 나와 서는 행동이 중요합니다. 아브라함은 비록 철저하게 믿지는 못했지만, 하나님을 섬긴다는 점에 있어서는 철저하게 행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명령을 내리실 때에는 무조건 행하였습니다. 지금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직접적인 명령을 내리시지 않으시기 때문에 달리 바꿔 말하자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았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왔을 때에, 세상의 죄악을 멀리하고, 악한 이들에게 정의를 세웠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간구하였고, 나그네를 영접하며 하나님 뜻에 따라 살았을 때에 그는 복을 받았습니다.

완벽하게 믿지는 못했지만 행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행동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에게 복을 주시겠지 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행동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 그대로의 복을 받았습니다. 진정으로 웃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가는 말

이삭은 비웃음이 아니라 ‘참된 웃음’의 약속입니다. 이 웃음은 나 혼자만의 웃음이 아니라 듣는 자마다 함께 웃게 되는 진정한 기쁨의 웃음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나님을 완전하게 믿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을 듣고 비웃어버렸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우리를 향하신 노력으로 인해서 그들은 참된 웃음을 얻을 수 있었고, 하나님의 약속대로 ‘웃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비록 굳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위해 간구하였고, 그들을 대접했고, 그들을 위해 싸웠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이라면 자신의 고향도 버리고 전혀 모르던 새로운 땅으로 옮겨가기까지 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복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느 자리에 서 계십니까? 아브라함과 사라가 처음 서 있던 곳, 아직도 비웃음의 자리에 서 계십니까? 아니면 크신 복을 받아 진정한 웃음을 누리고 계십니까? 아브라함과 같이 신앙의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우리를 위해 노력하고 수고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시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비웃음의 자리가 아니라 참된 기쁨으로 웃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모든 복으로 여러분들께 채워주실 줄 믿고 또한 그렇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성훈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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