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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권의 탄압에 저항하는 민중혼(民衆魂) (30)

기사승인 2017.07.12  16:5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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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석헌과 장준하, 그리고 박정희>

함석헌선생을 병문안하고 있는 문익환 목사(왼)

장준하를 잃은 함석헌에게 나타난 문익환은 더 할 수 없는 위로요, 기쁨이었다. 1976년 8월 27일, 「3.1구국선언」이 문제가 되어 서울지법의 대법정에서였다. “피고인들의 구성이 더 없이 화려했다. 전직 대통령, 제1야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사람, 전 외무장관, 한국의 사상가요 양심의 상징 (함석헌을 일컬음, 필자주), 야당의 거물들, 기독교계 장로, 신·구양교회의 지도자들, 대학교수, 거기 남자만 있으면 그림이 안되니까 여성 그리고 변호사들까지 대거 참여해 극적인 효과를 높이고 있었다” (김형수, 문익환 평전 p486).

바로 그 자리에서 였다. “「3.1선언」을 하게 된 동기가 무엇이냐?”는 검사의 심문에 아주 똑똑한 음성으로, “장준하의 뒤를 잇기 위해서 입니다”하는 소리를 듣게 된 함석헌은 바로 그 문익환에게서 죽음에서 다시 살아온 장준하를 보는 듯했다. 장준하가 그 한의 죽음(恨死)을 한 후 정확하게 6개월여 “가위눌려 있던” 그 수모스러움에서 풀려나고 있었다.

다시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다. 장준하가 그 죽음을 당하기 전 해, 장준하의 간청이 있어 새롭게 출범하는 민주회복 국민회의 윤보선·김대중과 함께 대표위원을 수락하고서도 장준하의 유고 후엔 회의는 물론 대표위원 모임에도 출석하지 못하고 정말 자기답지 않게 엉거주춤해 오고 있었는데, 「3.1민주구국선언」후, 특히 8월 법정에서의 문익환의 그 발언이후 확실히 그 이전의 자신을 회복해 가고 있었다.

「3.1민주구국선언」다음 해 1977년, 재야는 다시 허리를 묶고, 신발끈을 맨다. 민주주의의 신장과 통일세력, 통일 운동의 확대를 그 주제로 하는 「민주주의와 민족 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을 결성하고, 1979년 함석헌은 김대중과 함께 그 공동의장에 취임한다.

이 함석헌의 1979년 3월 공동의장의 수락은 함석헌의 생애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이제까지 함석헌이 참여하는 모든 시민 운동체의 대표, 의장, 위원장 하는 것은 예외 없이 장준하의 청에 의해서 수락된 것들이었다. 그처럼 함석헌의 외부활동 특히 조직 활동은 장준하 아니면 불가능했다고 하리만큼 밀착되어 진행돼왔다.

그러나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의 김대중과 함께하는 공동의장은 누구의 간청도 없이 자원한 것이었다. 함석헌이 1979년 3월 위의 직을 가벼운 마음으로 수락하고 이전의 활동과 달리 상당한 시간과 경비를 투자하면서 그 직무를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지난해(1978.5.8.), 10여년 동안 병석에 누워있던 그의 아내 황득순(黃得順)이 세상을 떠나 개인적으로 거칠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함석헌의 부부생활은 그렇게 편치는 않았다. 황득순은 함석헌에게 더 할 수 없는 여인이었다. 황득순이 함석헌을 자신의 남자로 만난 후 숨질 때까지 평생을 두고 하는 말이 이미 알려진 대로 “나야 뭐...”였다. 자신에게 어떤 어려움이 와도 그저 “나야 뭐...”했다. 황득순 그 나이 17에 한 살 아래 16의 함석헌을 만났다.

영특, 의젓한 함석헌과는 많이 달랐다. 특히 다른 점이 글하는 자세에서 였다. 이상스럽다하리만큼 황득순은 ‘글’과 거리가 있었다. 황득순을 며느리로 맞은 함형택(咸亨澤)은 며느리의 글머리를 깨우치기에 손수 글공부를 가르치기도 했고 글 선생을 붙여 보기도 했지만 끝내 득순은 글을 못하고 말았다. 함석헌이 성장해 갈수록 며느리의 글 없음이 맘에 걸렸다. 함석헌이 일본 유학중 방학이 되어 귀국하면 함형택은 함석헌이 며느리와 떨어지지 못하도록 적지 아니 맘을 쓰곤 했다.

그러나 며느리 황득순은 형언 못하리만큼 함석헌에 대해 지극한 맘을 품고 있었다.

“나야 뭐....”하는 맘이었다. “나야 뭐...”

황득순이 평생을 두고 해오는 말, “나야 뭐...”는 나는 아무렇게 되어도 괜찮다는 것이었다. “‘나는 아무렇게 되어도 괜찮다’는 말은 그저 남편 함석헌만 잘되면....”한다는 말이었다. 그렇게 함석헌만을 위해서 살다간 황득순은 숨질 때도 남편을 곁에 두지 못했다. 황득순이 세상을 뜨던 날, 함석헌은 광주시민들의 간청이 있어 광주에 「민주주의와 통일」을 주제로 강연을 하고 있었다. 그는 강연도중에 황득순이 세상을 떠났다는 연락이 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함석헌은 강연을 마치자마자 서울행 열차를 탔다. 집에 돌아오니 소문은 사실이었다. 아들과 딸들 손자, 손녀들이 황득순을 지키고 있었다. 갑자기 “내가 죄인이었구나!”하는 생각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숨지기 전에 무슨 말이 없었느냐? 아들 우용에게 물었다.

“...그저 늘 하는 말씀이셨죠, ‘나야 뭐....’”

황득순은 그렇게 갔다. “당신이 됐으면 된거죠...”

함석헌이 한국 현대사에 어떤 추종도 불허하리만큼의 큰 정신, 큰 사상, 큰 양심일 수 있었던 것은 “나야 뭐...”하는 황득순이 있어서 였을까?

후에 함석헌은 황득순에게 이렇게 용서를 구했다.

“나는 당신에게 죄를 범했소이다. 당신은 내게 모든 것을 주었는데 나는 한번도 당신을 친구로 대한 적이 없었소이다!”

함석헌은 그 밤, 많이 울었다. 회개의 울음이었을까?

함석헌, 박정희의 죽음을 정확히 예언하다

1979년 8월 11일, 스위스에서 개최되는 퀘이커 세계대회 참석차 출국, 세계대회를 마치고 캐나다를 들린다. 역시 캐나다 교포들의 간청에 의해서 였다. 이미 함석헌은 60년 초 처음으로 세계여행길에 나설 때의 함석헌이 아니었다. 세계 곳곳에 ‘우리선생님’이라 부르면서 대면을 그리는 해외동포들의 줄을 서는 지경이었다. 9월 캐나다를 방문한 함석헌은 역경 중에 있는 동포들에게 ‘생(生)은 명(命·命)이시니 앞서려하지 말고 확실히 살라’ 격려하고, 10월 초 워싱톤을 방문한다. 10월 14일 워싱톤 한인교회가 함석헌을 주강사로 개최하는 강연회가 계획되어 있어서였다. 뉴욕 한인교회가 주최하는 강연회가 계획되어 있어서였다.

바로 뉴욕 한인교회가 주최하는 이 강연회에서였다. 불과 12일 후에 벌어질 박정희의 죽음에 대해 아주 정확한 예언을 한 것이다. 그날 저녁의 강연 제목이 “웃으면서 싸워봅시다”였는데, 박정희의 죽음을 예언했다는 것은 바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두고 하는 말이다. ‘절’(worship, duty)을 가지고 한 말인데,

“사람이 절을 하지, 짐승은 절 없어요. 이것이 어디서 나왔냐하면 생각하는데서 나온 거야. 절을 할 때는 코가 땅에가 닿아야 해. 서양 사람들은 그냥 끄덕하는데...그건 안돼요. ‘워십’이라고, 듀티라고 하는 건 그건 아주 엎디어서 사지와 몸뚱이 아주 납작 엎드려 정말 하나님한테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하고 예배하는 거에요. 사람은 그걸 받아먹을 놈이 없어요. 세상에선 정치꾼들이, 임금 때 대통령 때 이것들이 ”내가 기다“(내가 절 받을 자다, 필자 주)하는데, 그것은 아버지의 이름을 쓴 밤나무에 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 제사하려면, 지금은 사진 있으니까 사진 놓으면 되지만, 사진 없는 옛적엔 나무 중에 비교적 썩지 않고 오래가는 밤나무를 골라다가 아무개 신위(神位)라 써 세워놓고 그걸 보고 절을 했어요. 상점에 가서 그걸 고를 때 요놈으로 할까 요놈으로 할까? 그러니까 심볼과 실체를 구별 할 줄 알아야지. 제가 실체인 것처럼 칼 뽑아들고 ‘내가 제일이다. 내가 나간다’그러면 그건 벼락 맞을 소리.”

여기까지 말한 함석헌이 엉뚱한 말을 내뱉는다.

“그래서 벼락 맞았지, 하나님께 갈 절을 도둑질 해 갈라먹고 망하지 않은 재주가 없어요.” 듣는 이들이 의아한 표정이었지만 함석헌은 태연했다. “신이 되려한 박정희 벼락 맞았다”는 단언이었는데, 그것이 박정희가 절명하기 12일 전이었다.

그야말로 경적(經的)인 예언이었다.

박정희의 변고 서식을 들은 함석헌은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11월 15일 귀국, 「씨ᄋᆞᆯ의 소리」 독자들에게 편지를 쓴다. 그 편지엔 이런 말이 담겼다.

“그때에 그래 79년 10월 26일에 시국이 어떻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안 놈이 하나나 있었습니까? 그런데 70년대에 이 보다 더 큰 사건이 무엇입니까?”

함석헌은 ‘하나님은 못 믿겠어도 역사는 믿으라’했다. 하나님은 없다 할 수 있겠지만 뜻을 없다 할 수는 없다‘했다. 함석헌으로 박정희의 죽음을 예언하게 한 것은 그가 ’절대‘로 확신하는 역사요, 뜻이었다.

“그래서 벼락 맞았지”(<끝나지 않은 강연> 17쪽)

필자는 박정희의 죽음을, 그리고 그를 제거한 김재규와의 관계를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드디어 유신대란을 일으키게 된다. 그것은 자신의 종신통치체제를 위한 것이었다. 유모교수를 당시 대만에 특파해 대만의 총통제(總統制)를 연구해 오게 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오직하나님만 섬겨라.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했을 때 그 다른 신이란 인간신 파라오(Pharaoh)를 말한다. 신이 된 인간 말이다. 유신이란 박정희라는 인간이 신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사람이 신이 되려 하다가 망하지 않는 놈이 없다! 하나님은 신이 되려는 인간을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 그래서 예언자들을 보냈다. 겸손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겸손 하라. 오만하지 말라. 그래도 듣지 않았다. 하나님으로서도 죽이는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바로를 홍해 바다 속에 던져버렸다. 김재규를 박정희에게 보낸 것은 계약의 하나님 야훼셨다. (문대골의 “박정희는 스스로 신이 되려 했다”, 「의사 김재규」 59쪽)

함석헌에겐 맘껏 해 보는 세계여행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흩어져 있는 해외 동포들이 큰맘 먹고 초청하는 여행도, 외국 국무성들의 초청으로 이루어지는 여행도, 심지어는 퀘이커와 같은 종교단체로부터의 초청여행도 예외 없이 그랬다. 국내의 문제 때문이었다. 그는 그가 역사교사로 근무하던 평북 오산 중학의 10년을 빼고는 소위 제도권공인의 생활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그가 그의 육을 벗고 영원에 들 때까지 그랬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개인 살림이라는 게 없었다.

신약성서의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께 ‘메인 몸’이라했고, 예수그리스도의 ‘종’이라 했지만 함석헌 역시 그랬다. 그는 역사의 종으로, 「씨ᄋᆞᆯ」의 돌봄이로 살아야했다. 장준하가 갔고 문익환은 감옥에 있다. 함석헌은 그가 그의 신으로 믿는 「뜻」 앞에 무릎을 모을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리되어가는 게 다행스럽다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가 절대로 타인이 따를 수 없는 ‘골방’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함석헌의 골방!

함석헌을 말하려는 모든 자들은 이 골방의 함석헌을 알아야 한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고 울부짖는 함석헌의 그 ‘생각’이 골방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다시 새 싸움을 싸우기 위해 수평선 너머로부터 오는 세미한 ‘님의 소리’를 듣기 위해서 말이다. 함석헌은 뜨거운 심호흡을 한다.

“골방에 들리라 깊깊이...”

 

문대골 목사 webam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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