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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들이 외쳤다..."우리는 예수를 바라봅니다!"

기사승인 2017.06.23  14:4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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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개혁 500주년기념 신학생시국연석회의 연합기도회

신학생들이 또 한번 연대의 끈을 동여맸다. ‘신학생시국연석회의’로 故백남기 농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세월호 등 시대의 아픔에 함께 연대했던 신학생들이 이번엔 그들의 학교를 위해 모였다. 예배의 제목은 '우리는 예수를 바라봅니다'. 22일(목), 130여명의 신학생들이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개혁돼야 할 학교, 교단, 한국 교회를 위해 예배 드린 뒤 행진을 이어갔다.

이들이 주요 의제로 삼은 것은 오랜 기간 투쟁해온 감신대 학내 사태, 한신대 학내사태를 비롯해 예장통합의 총대 차별 문제, 기독교대한성결교회의 교회세습방지법 도입 문제 및 일부 교단의 혐오 조장문제 등이다. 각자의 구호를 담은 플랜카드, 십자가와 함께 감리교 본부에서 출발, 기장 총회, 예장 통합 총회를 거점으로 행진한 뒤 성찬을 나눴다.

감리교 본부 앞에서 진행된 시작예배에서 각 학교 대표들이 기도문을 낭독했다. 

감신, "정의를 위한 우리의 행동을 봐야할 사람은 우리를 끝내 외면했습니다"
한신, "학교엔 하나님보다 위선과 아집이 더 큰 하나님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서신, "성결교회는 더 이상 성결하지 않습니다"

추은지 학생 ⓒ에큐메니안
이화평 학생 (장신대 신대원학우회)은 "주님이 말씀하신 바른 공동체, 몸된 교회를 회복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에큐메니안
김태윤 학생(기독윤구원 느헤미야)은 "정의와 공의의 빛이 신학교에 비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 했다 ⓒ에큐메니안

“...하나님. 우리는 정의를 위해 많은 것들을 했습니다. 한 학우는 곡기를 16일 동안 끊었고 한 학우는 15일 동안 고공에 올라갔습니다. 그들은 모두의 짐을 지고 고독과 외로움 고통과 싸워줬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행동을 봐야할 사람은 끝내 외면했습니다. 이규학 집무대행은 이사장이 됐고 더 많은 권력을 손에 쥐려 합니다. 1년 동안 뽑히지 않았던 총장을 자신들 맘대로 뽑으려 하고 그들만의 세상 속에서, 자신들의 말이 법인 곳에서, 자신들을 위한 학교 세우려 하고 있습니다. 그곳에 예수님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온갖 술수와 편법을 사용하며 이야기를 들어달라는 학생들을 향해 문을 굳게 닫았습니다. 우리들은 그들의 야만과 욕심에 눈물 흘려야했습니다. 그러나 주님,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결코 싸움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의 정의가 바로 서고 예수님 앞에 부끄럽지 않게 고통에 연대하고 불의에 저항하며 이 길을 끝까지 걸어갈 것입니다.” 추은지(감신대 여성신학회)

“하나님. 우리는 지금 거짓과 탄압, 거대한 이기심으로 가득 찬 한신 임마누엘 동산 바라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들의 삶과 신앙과 꿈과 설익은 이상으로 당신의 나라를 그리며 신학의 길로 들어선 우리 자신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우리는 지금 우리 학교가 당신보다 더 큰 하나님으로 자리하고 있는 위선과 아집 앞에 짓밟혀 처참히 뭉개지고 있는 것을 바라봅니다. 하나님. 도저히 저 거대한 괴물들 당해내 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우리는 지금 여기 서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지금 우리의 마음속에 가득한 억울함 분노는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 감정이 잘못된 것은 아닌지 하루에도 수십 번 고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우리가 절대로 회개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그들이 회개하게 해주십시오. 이것이 거룩한 억울함, 분노라고 믿고 싶습니다. 우리와 함께해주십시오. 함께 싸워 거대한 괴물들을 물리쳐 주십시오.” 이신효 (한신대 민중신학회)

“하나님. 성결함이 죄로부터의 정결함, 세상으로부터의 구별된 삶이라면 성결교회, 한국교회는 성결하지 않습니다. 교회 건물을 사유화하기위해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포장하고 모두를 속이는 목사, 이를 비판하지 않고 공고히 하는 목사들이 있기에 성결하지 않습니다. 복음전하는 선교의 요람이자 상아탑인 신학대학에서 거룩과 삶이라는 하나님의 원리가 아니라 돈과 권력의 원리대로 등록금과 헌금을 가지고 자신의 배를 불리는 총장, 목사들은 편한 삶을 살고 있고 이들을 비판하지 않는 자들이 있기에 성결하지 않습니다. ...교회를 자신과 사위에게 세습함으로 탐욕을 정당화 하는 목사들이 회개케 하여 주십시오. 총장이라는 이름으로 탐욕을 채우는 자들의 비리 의혹이 수사를 통해 낱낱이 밝혀지고 범죄자들이 정의와 법 앞에서 심판받게 해 주십시오. 한국교회의 불의를 침묵하고 부패한 자신을 알지 못하는 자들의 더럽고 냄새남을 스스로 깨닫게 해주십시오. 성결교회가 성결하라고 외칠 수 있는 교회 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진지한 (서울신대 약동하는 서신인)

이정배 교수 ⓒ에큐메니안

이어 하늘뜻 펴기를 맡은 이정배 교수(전 감신대)는 “여러분들이 오늘의 마틴 루터”라며 신학생들을 격려했다. 이 교수는 “자신의 교단, 학교에 의인 열사람이 없어 그 누구도 소리내지 못할 때 길가에 나뒹구는 돌멩이처럼 흔하고 값었는 신학생들이 바로 그 사명으로 불려진 것”이라며 돈과 권력을 탐하는 교수, 목사들을 비판하기도 했다. 

“이 자리에 모인 신학생들은 비록 힘이 없어 길가의 돌 처럼 소리치고 있으나 당신들이야 말로 하나님의 미래를 말할 수 있고 기다릴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그 소망을 품고 환난을 견딜 수 있는 자격도 여러분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이 자격을 포기하지 말고 빼앗기지도 맙시다!... 

...종교개혁 500주년이 눈 앞인데 종교권력자들은 하나님의 미래인 신학생들의 미래를 빼앗아 현실을 암담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러니 기독교가 주는 물에 누가 목말라 하겠습니까? 말에 삶이 실리지 않아 힘을 잃은 목사, 교수들의 말을 듣고 글 읽는 후학의 삶이 어떻게 달라지겠습니까? 과거의 신학유산을 탕진하고 미래 주역들의 삶을 빼앗는 종교권력자들에게는 신학생들이 보잘 것 없는 무지렁이 처럼 보이겠으나 여러분은 밟히고 밟혀도 다시 일어나는 불 같은 존재입니다. 다시 곧게 일어나 외치길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예배의 주제 ‘우리는 예수를 바라봅니다’의 본 뜻입니다.“

예배가 진행될 동안 몇몇의 감신대 학생들 (백인혁, 이정한, 최건희 학생)은 감리교 본부 안 행정기획실 앞에 '신학생시국연석회의 96개 논제' 대자보를 붙였다. 직원들의 반발이 있었으나 큰 소동은 없었다. '96개 논제' 전문은 아래에 있다. ⓒ에큐메니안
16일간 단식투쟁했던 이종화 학생이 문익환 목사의 시 <잠꼬대 아닌 잠꼬대>를 낭독했다 ⓒ에큐메니안
종탑에 올라 15일간 농성을 이어가던 백현빈 학생은 이날 종탑에서 내려와 예배와 행진에 합류 했다 ⓒ에큐메니안

감리교 본부에서 시작한 행진은 종로5가 한국기독교장로회(이하 기장) 총회를 거쳐 예장통합총회 앞 성찬례로 이어졌다. 거점에서 거점으로 이동할때마다 구호는 달라졌다. "단결한 신학생은 패배하지 않는다"로 시작한 구호는 “감신 학내사태 책임지고 이규학 이사장은 퇴진하라!, 정치목사들의 대학 사유화 중단하라!, 한국교회는 모든 종류의 세습을 중단하라!, 예장통합은 총회 총대 차별을 철폐하라!, 한신의 독단적 총장선출 중단하라!, 기독교대한성결교회는 교회세습방지법을 도입하라!, 복음은 평등하다. 한국교회는 혐오를 중단하라!”등으로 다양하게 연호됐다. 

 

기장 총회 앞에서는 한신대 학생,동문,교수의 기자회견이 진행됐다. 학내사태로 재판을 앞둔 한신대 학생들의 발언과 이를 지지하는 심상오 동문(총동문회 사무총장), 남구현 교수(전 교수협의회 의장)의 발언이 이어졌다. 지난 총장선임 과정에서 빚어진 학내사태로 경찰에 고소된 학생들 12명 중 5명은 수원지방검찰청 공안부로 사건이 송치돼 27일 재판을 앞두고 있다. 

이들은 '한신민주화를 위한 법정투쟁 공동대책위원회'란 이름으로 발표한 성명을 낭독하기도 했다. 법정투쟁 공대위는 "채수일 전 총장, 한신학원 이사회, 학교 당국의 만행을 법정에 세울 것"이라며 "법정에 서서 과거 이 땅의 인권과 민주주의, 진보를 위해 투쟁한 역사를 가진 한신대가 오늘날 어떠한 모습인지 우리 사회에 폭로할 것"이라고 전했다. 

마지막으로 예장 총회 앞에 도착한 신학생들은 이동춘 목사(예장 통합)의 집례로 성찬을 나눴다. 

기장총회 앞에서 진행된 한신대 학생들의 기자회견 ⓒ에큐메니안
행진대열이 마지막 거점인 예장통합총회에 도착했다 ⓒ에큐메니안
지지발언하는 남기평 목사(EYCK) ⓒ에큐메니안
이동춘 목사 ⓒ에큐메니안

한편, 신학생시국연석회의는 지난 13일 열린 제3차 총회를 통해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각 학교 및 교단 문제 공동대응과 함께 ▲스텔라데이지호 가족들과 함께하는 기도회를 결의했다. 이날 열린 기도회에 이어 신학생들은 스텔라데이지호 가족들과 함께 연대한다. 기도회는 오는 28일(수) 오후2시, 광화문 세월호 광장에서 진행될 예정이다. 

1. 우리의 주님이며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마 4:17)고 말씀하실 때 그것은 신자들의 전 생애가 참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2. 이 말씀이 우리의 내적 개인적 반성에서 머무르고 교권의 이해와 용서를 바라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3. 다시 말해 참회는 개인의 내적인 영역에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전인적인 구원의 역사가 삶에서 총체적으로 보여야 한다.
4. 그런고로 종교개혁 역시 교단 내의 산적한 문제점들에 대해 “회개합니다.”하고 잠실운동장 같은데 모여서 기도하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내외부로 전적인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작금의 종교개혁 500주년이라는 교계의 자랑과 기념행사들은 전혀 유의미하지 않으며 이와 마찬가지로 전혀 건강하지도 않다.
5. 뱀이 그 허물을 벗는다 한들 비둘기가 될 수 없듯이 교회도 본래의 잘못을 가진 채 일회적 참회 퍼포먼스를 반복하는 것으로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불릴 수 없다. 따라서 교회의 개혁은 일회적 반복이 아닌 계속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되어야 한다.
6. 교계의 자칭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죄는 스스로 용서하고 사회적 약자와 타자들에 대해서는 정죄하며 교회를 우려하는 사회의 목소리에 대해서는 교회를 흔드는 악한 것으로 치부해버리곤 한다.
7. 하나님께서는 그의 대행자를 참칭하는 교계 지도층의 권력에는 전적으로 복종하면서도 그밖에 다른 모든 일에 대해서는 겸손할 줄 모르는 자의 죄를 결코 사하시지 않으신다.
8. 그런즉 이 죄는 교계의 권력층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며 우리 역시 그 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9. 교계의 숱한 비리와 잘못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 교계를 키우고 있는 것 역시 사실이기 때문이다.
10. 교회를 사랑하는 것과 교회의, 교계의 잘못을 용인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교회를 사랑해야 한다는 편한 변명 아래 교회의, 교계의 잘못에 일정 부분 방조하거나 동참해왔다.
11. 또한, 우리가 선지동산이라고 부르는 신학교 안에서부터 누구의 자녀인지,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에 따라 서로 무리 지어 행동하였으며 여성이라고, 혹은 그 밖의 어떠한 소수자라는 이유로 배척하고 차별하였다. 이것은 거룩한 공교회를 가르는 행위이다.
12. 교회를 가르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가르는 것이며 이러한 가라지가 충분히 자라났다면 이제 그것을 뽑아야 할 것이다. (마 13:30)
13. 이와 같은 행위 속에서 신학생들 또한, 아니 그보다 앞서 회개해야 함은 자명하다.
14. 이것은 누군가를 지목하여 정죄하고 배척하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15. 교회는 계속해서 성화 되어야 하며 이것은 교회를 이루는 각 사람의 회심이 계속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16. 또한 동시에 이것은 공교회 전체의 회심이 수반되어야 한다.
17. 교단과 교계의 잘못을 하나로 묶어 그저 교회가 잘못했다고 말하는 것은 부도덕하다.
18. 그것은 수많은 문제의 각 층위를 다루지 않고 마치 하나인 것으로 여기게 하기 때문이다.
19. 하나의 죄라는 이름 아래 더욱 심각한 죄는 마치 가벼운 죄처럼 인식되고 더욱 가벼운 죄 – 혹은 죄가 아닌 것 – 은 마치 큰 죄악인 것처럼 인식된다.
20. 그러므로 각 잘못은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그 특유성에 대한 성찰이 있어야 바른 참회가 가능할 것이다.
21.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의 잘못은 가장 먼저 교회의 사유화에서 찾을 수 있다.
22.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골 1:24)으로 그것은 사유 될 수 없고 해서도 안 된다.
23. 교회를 세습한다는 것은 교회를 개인 혹은 특정 집단의 소유물로 보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행위이다. 교단 내 세습방지법이 있는 교회는 물론이거니와 세습방지법이 없는 교단은 속히 도입하여야 할 것이다.
24. 세습방지법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자식에게 교회를 물려주기 위한 다양한 편법이 있지만 가장 낯부끄러운 방법의 하나는 분가를 가장한 허수아비 또는 유령교회를 만들어 재합병하는 방식이다. 우리는 교회가 유령에게 잡아먹히지 않도록 그것을 막아야 할 의무가 있다.
25. 목회자를 양성하는 기관인 신학교 역시 개인 또는 특정 집단의 소유물로 머물러 있을 수 없다.
26. 신학교가 이사회와 이사장만의 것이 된다면 그것은 신학교라기보단 이사장학교로 불러야 할 것이다. 그런 고로 감리교신학대학교는 이규학대학교로 이름을 바꾸는 것을 검토해보길 바란다.
27. 한신대 역시 이극래대학교로 이름을 바꾸는 것을 고려해보길 바란다. 총신대와 침신대도 원한다면 그와 같이 할 수 있겠다.
28. 만일 그런 우스꽝스러운 이름이 부끄럽게 여겨진다면 이제라도 자신들이 한 행위가 얼마나 부끄러운 것인지 깨닫고 학교 운영에 있어 학내 구성원의 의견이 반영될 수 있도록 학내구성원의 뜻에 수긍하길 권한다.
29. 교단과 교계 역시 특정 집단에 의해서 사유화되고 있다. 교단별로 있는 이른바 ‘출세라인’의 이야기를 듣노라면 이것이 교회의 이야기인지 대기업에서 라인 타는 이야기인지 구분하기 힘들다.
30. 사역자가 어떠한 교회에서 사역한 것이 그의 발자취를 보이는 것이 될 수는 있으나 교계에서 사역자들이 특정 교회에 단계를 밟듯 들어가 일정 세력을 갖게 되고 자기 사람을 만들고 또 자기 사람을 다른 교회에 이른바 꽂아주는 행위는 개교회를 본인 소유의 회사로, 공교회를 시장으로 보는 것이라고밖에 이야기할 수 없다.
31. 그러나 교회 안의 노동처우를 살펴보면 이들이 교회를 본인 소유의 회사로 보지 않는 것은 확실해보인다. 이른바 교계와 교회의 지도자들은 세금도 내지 않으며 교회 안에서 노동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봉사와 헌신이라는 말로 부교역자와 교회 직원들의 노동력을 착취한다.
32. 마찬가지로 부교역자들과 교회 직원들은 교회에서 일하지만, 본인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증명할 수 있는 서류 같은 것을 본적도 작성한 적도 없다.
33. 이처럼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지 않게 되니 부교역자와 교회 직원들은 불규칙한 업무와 간혹 생기는 비인격적 대우에도 봉사와 헌신으로 사역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있다. 하나님께서 이런 노동력에 기댄 교회 운영을 바라실 리는 만무하다.
34. 교회 운영이 아니라 기업이라고 해도 당혹스럽기 그지없다. 한국교회의 재정은 어떻게 사용되는지 제대로 공개되지 않는다. 신자들은 본인들이 낸 헌금이 진실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쓰이게 해달라고 매일 기도를 드린다. 보지 않고 믿는 자에게 임한 복(요 20:29)이 이것일까?
35. 교회의 재정만이 아니라 교회에서 운영하는 복지단체의 재정 및 인력 역시 불투명하고 당혹스럽게 이용된다. 교회의 부교역자와 직원들은 복지시설의 업무를 떠맡고 복지단체의 직원이 교회의 일에 동원되어 서로가 목적과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36. 교회는 시장이 아니며 교인은 재화가 아니다. 내 교회의 양적 성장을 위해 다른 교회를 죽이는 수평이동은 공교회를 죽이는 일이다. 이러한 행위는 지양되어야 한다.
37. 교인을 포함한 교회의 매매는 말할 것도 없다. 그리스도의 몸을 사고 파는 그리스도인이 있단말인가!
38. 교회가 이렇게 맛을 잃은 소금(눅 14:34)처럼 되어서 쓸모가 없게 되었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보단 공포를 불어넣는 데 노력하게 되었다.
39.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 그리고 그들의 권리 요구를 악마화하며 교회의 적으로 간주하여 내부의 단합을 도모하는 일은 교회에서 해야 할 일이 아니다.
40. 교회에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 내부의 단합을 도모하니 정작 중요한 회개와 은혜가 사라져 버렸다.
41. 한국교회에서 은혜는 값싼 것이 되어버렸고 회개는 남발되어 뱀이 허물을 벗는 것보다도(제5 논제 참조) 쉬운 것처럼 되었다. 약자와 소수자들에게는 지옥의 불맛을 약속하신 두려운 하나님이 내부의 단합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용서하는 꿀맛 같은 분이 되어버린 것이다.
42. 그러나 참다운 회개는 대가를 달게 받는다. 그러나 지금 교회가 남발하는 내부적인 값싼 은혜, 관대한 회개는 은혜와 회개를 우스운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43. 이처럼 내부의 결속을 위한 말이 남발되다보니 교회의 강단에선 시대적 메시지가 상실되었다.
44. 내부의 결속에만 경주한 나머지 지역사회에 대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
45. 교회당이 위치한 지역사회에 아무런 공헌도 하지 못하는 교회가 선교를 외친다면 그것은 십자가를 부끄럽게 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니 사실 사회는 교회의 공헌을 바라지 않을지도 모른다. 교회는 오히려 염려 받는 처지에 놓여있다.
46. 꼴찌 된 자가 되어 으뜸이 되려는 것인지 모르겠지만(마 20:16) 오늘날 개신교는 가톨릭, 불교와 3대 종단 신뢰도 조사에서 언제나 꼴찌를 면치 못하고 있다.
47. 그런 교회가 신천지나 하나님의 교회처럼 횡행하는 사이비종교를 보고 “저것은 악하다!”고 사람들에게 외친들 그 말을 아무도 귀 기울여 듣지 않는다. 슬프게도 이것은 교회가 쌓은 잘못의 결과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48. 그룹(בורכ)을 보고 Group이라고 설명하는 사이비 종교에 현혹되는 교인을 만든 교회는 잘한 것이 하나도 없다.
49.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성경공부가 얼마나 편협한지 알려주는 단적인 예이기 때문이다.
50. 몇몇 목회자들은 교인들이 목회 – 인듯하지만 자신들의 돈벌이 – 에 방해될 만큼(사실 교인이 성경을 잘 아는 것이 목회에 방해가 된다면 그것은 참으로 처참한 것이다.) 성경을 아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51. 그런 이유로 많은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성경공부는 사실 성경공부라기보단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세계관을 심는 교리공부에 지나지 않는다.
52. 이런 풍조 아래서 질문이란 금기가 되었다. 교회 내에서 질문은 죄악시되었고 이는 맹목적 믿음을 가진 교인들을 양산하게 되었다.
53. 맹목적 믿음을 가진 교인들을 통제하는 방법으로 교회가 채택한 것은 열광주의이다. 교인의 믿음은 방언의 수준으로 계량되며 방언의 수준은 그것이 얼마나 복잡한지에 따라 평가받는다.
54. 하지만 우리는 방언의 수준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방언으로도, 깨친 마음으로도 기도해야 한다. (고전 14:15)
55. 방언만을 중시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을 멀리하는 것은 개인에게는 모르겠으나 교회에겐 유익하지 못한 것이다. (고전 14:6)
56. 교인의 신앙은 개인화되었으며(그렇다고 해서 교회에 온전한 ‘개인’은 존재하지 않으며 이것은 ‘파편화’에 더욱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여하한 예전 없이 강단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하나님의 진리에 다가갈 수 있다고 가르치는 예배는 개인화된 신앙에 더없이 알맞은 형식을 갖추고 있다.
57. 현세의 복을 기원하는 기복신앙이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철저히 개인화된 신앙 속에 자리할 때 비로소 악한 것이 된다. 더욱 악한 것은 교회가 열광주의를 위해 이것을 이용해왔다는 것이다.
58. 성숙한 신앙생활이란 하나님과 성도의 개인적인 신앙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교회와 사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어야 한다. (고후 2:15)
59. 교회에서의 생활과 사회에서의 생활은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기도는 교회당 안에서만 유효한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60. 또한, 교회와 사회의 삶을 구분하는 태도는 교인 개인뿐 아니라 교회가 사회적 아픔에 대해 둔감해지게 하는 결과를 끌어낸다.
61. 사회적 아픔에 대한 교회의 공감은 취사선택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값없이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교회가! (롬 3:24)
62. 교회는 아픈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는 데는 적극적이지만 그들의 목소리를 전하거나 같이 고난당하는데 에선 손을 끊는다. 그들은 교훈의 주제이거나 동정 혹은 무시의 대상이 될 수는 있어도 연대나 동일시의 대상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63. 그러나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그리스도에게 한 것이고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그리스도에게 하지 않은 것이다. (마 25:40, 45)
64. 이런 말씀에 비추어 볼 때 교회의 바른 사회참여는 권력욕에 찌들어 기득권을 두둔하는 기독당이나 기독자유당, 진리대한당과 같은 정당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선포하고, 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주고 주님의 은혜를 선포하는 데 있다. (눅 4:18)
65. 그러나 몇몇 교계의 지도자들은 이런 사실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듯하다. 각종 포털사이트에 금권선거라고 검색을 하면 추천 키워드에 한국기독교총연합회라고 나온다. 한기총은 몰락했지만, 그들은 아직도 한국기독교계의 지도자로 불리고 있다. 슬프게도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66. 교단의 총회도 교단 내 권력가들의 각축장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굳이 어느 교단이라고 말하지 않겠지만 어떤 교단의 총회에서는 총무가 총을 들고 앞에 나가 총대들을 위협하기도 했다. 이 문단에서만 총이 총 몇 번 나왔는지 모르겠다. 총을 들고나온 총무는 몇 년 뒤 다른 목사를 칼로 찔러 살인미수 혐의로 징역 7년을 선고받아 복역 중이다.
67. 각 교단 최고 의사결정기구라는 총회에 참석하는 총대 인원 구성을 보면 이 총회가 교인들의 의사를 제대로 반영할 수 있을까 싶다. 거의 모든 총회에서 50대 이상 비율과 남성비율이 각각 90%에 육박한다. 이것은 중년, 노년 남성의 독식이라 부를만 하다.
68. 따라서 각 총회는 여성 총대 할당제를 보다 강력하게 추진해야 할 것이다.
69. 하지만 여성 총대 할당제를 시행하려고 해도 많은 교단에서 여성 총대로 추대할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다.
70. 이것은 현재 한국 교회의 성평등의 현실을 보여준다. 남성 교인보다 여성 교인이 더욱 많지만, 여성 장로, 여성 목사, 여성 총대를 찾기 어려운 것은 그동안 한국교회가 지극히 남성중심적으로 흘러왔음을 증명한다.
71. 교회 내 사역과 봉사와 사역도 마찬가지이다. 개교회 안에서도 여성 교인들은 식사준비와 같은 일을 하고 여성 교역자는 유치부, 어린이부, 혹은 기관사역을 해야 한다는 인식이 팽배하다. 교회 내 성차별의 근절책이 필요하다.
72. 남성은 정, 여성은 부라는 전근대적 사고방식은 이제 교회에서 퇴출당해야 한다. 루터가 수녀들을 억압적 수녀원에서 탈출시켰듯이 우리도 억눌린 여성을 교회에서 해방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때 그것은 남성에 의한 해방이 아닌 억압에 대한 자기 자신의 해방이 되어야 한다.
73. 또한, 교회 내 성폭력, 성추문에 대해서도 더욱 엄정한 태도가 필요하다. 교회를 사랑한다는 미명아래 이런 사실을 감추고 은폐하는 것은 죄를 감추고 은폐하는 것이다. 참다운 회개는 대가를 달게 받는다.(제42 논제 참조)
74. 특히나 교회 내 성폭력, 성추문을 보고 ‘여자문제’ 라고 칭하는 말은 반드시 사라져야 한다. 사실 그것은 절대다수 ‘남성 권력’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75. 신학교와 교회, 그리고 교계는 이제라도 여성혐오적 발언들을 멈추고 그동안의 행보에 대해 반성을 해야 한다.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마음에서 나온다. 잠시 입을 멈추고 마음을 바로하길 바란다. (마 15:18)
76. 교회 내 청년의 위치에 대해서도 교회는 더욱 깊이 고민해야 한다. 교회 인구가 역피라미드 화 된 지 이미 오래이며 이 상태가 지속된다면 결국 교회는 활기 없는 죽은 공동체가 되고 말 것이다.
77. 그렇다고 ‘요새 청년들이 이런 걸 좋아하던데 이런 프로그램을 만들어봐야지’ 와 같은 생각을 하진 말기를 바란다. 청년들이 교회에서 떠나는 이유는 교회가 청년을 타자화하고, 실존하는 공동체의 일원이 아닌 ‘미래세대’로만 바라보는 시선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78. 어디서 유행어 하나 듣고 와서 삼포 세대를 위한 공동체니, 욜로족을 위한 목회니 이런 거 생각하곤 속으로 아싸라비아 콜롬비아 외치셨을 텐데 그냥 생각만 하고 접어두셨으면 좋겠다. 그런 거 생각하느라 캡짱 고생했지만, 청년들이 앞서 말한 교회 안의 산적한 문제들을 외면하고 신앙생활을 할 리 만무하다.
79. 여성과 청년의 교회 내 지위 향상을 위해선 개교회에서도 성별, 연령별 장로 할당제를 고려해야 할 것이다.
80. 하지만 성별, 연령별 장로 할당제는 교회에 헌금한 금액이 장로를 선출하는 기준이 되는 지금의 교회에선 무의미한 말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고려할 필요 없이 사라져야 할 악습이다.
81. 만일 여성 안수조차 되지 않는 교단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교단법을 바꾸길 권한다. 지금은 2017년이다.
82. 교회가 이 모양 이 꼴이 되도록 묵인해온 자, 타칭 교계 지도자들과 신학자들은 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83. 총회에서 총무가 총을 꺼내고, 목사가 교인을 성추행해도 면피성 징계만을 내린 교단에서 약자와 소수자와 함께 그들의 권리를 위해 싸워온 목사에게 이단성 조사를 하겠다는 모습은 아무리 봐도 웃긴 것일 수밖에 없다.
84. 혐오와 차별의 언동이 강단과 교회에서 범람하고 있다. 타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을 멈추어야 한다. 타자에 대한 혐오는 성경적이지 않다. 본디 그리스도인은 타자가 아니었던가. (출 23:9, 신 10:19)
85. 이것은 신학교 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신학교 안에서 나오는 혐오와 차별의 언동은 학문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데 그 심각성이 있다.
86. 신학교 안에서조차 자유로운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우리의 교회는 고인 물이 되고 말 것이다. 신학교 안에서 학문의 자유가 지켜지고 다양한 논의들이 꽃을 피울 때 교회는 자라날 양분을 얻게 된다.
87. 한국의 교회는 이제 선하고 의로운 일에 마음을 합하여 그리스도의 뜻을 따르도록 노력해야 한다.
88. 만연한 개교회 성장주의보다 더욱 중요한 가치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것은 거룩한 교회로서의 역할이다. 교회는 구별되어 나온 이들을 말한다. 성장주의, 경쟁사회 속에서 구별되어 나와 주 안에서 이웃과 더불어 사는 기쁨을 이야기해야 한다.
89. 그렇지 않고 계속해서 개교회의 성장만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거룩한 공회가 아닌 자기들만 거룩하다 외치는 공해가 되고 말 것이다.
90. 이와 같은 우리의 요구들에 대해 떳떳한 이유를 들어 해결하지 않고 권력으로만 억압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교회를 원수의 조롱거리가 되게 만드는 일이요 또 그리스도인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다.
91. 그러나 우리에게도 의무가 있다. 우리는 이 요구들을 가지고 계속해서 각자 삶의 자리에서 악과 맞서 싸워야 한다. 이 글이 한번 보고 넘어가는 글이 된다면 우리에게 그것보다 슬픈 일은 없을 것이다. 이 글이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가 될 때까지 우리가 각자 삶의 자리에서 싸운다면 우리에게 그것보다 기쁜 일은 없을 것이다.
92.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백성을 향하여 평안도 없는데 "평안, 평안"하고 부르짖는 예언자들은 다 물러가라 (겔13:10 16 렘6:14, 8:11 살전5:3)
93. 그러나 그리스도의 백성을 향하여 "십자가, 십자가"하고 부르짖는 모든 예언자들은 축복을 받을지어다. - 사실 – 십자가는 없는 것이다.
94. 개혁이란 계속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개혁교회는 계속해서 개혁되어야 한다. 그 길은 좁고 힘든 길이지만 계속해서 경주해야 한다.
95. 이같이 하여 그리스도인들에게 위안과 성장과 개인의 영달만을 위해서보다 오히려 많은 고난 속에서 하나님 나라에 더욱 깊은 믿음을 가지게 해야 한다. (행 14:22)
96. 하나님 이 교회를 당신 손에 맡깁니다. (눅 23:46)

글 김령은/사진 한지수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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