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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선 교수의 독일 “교회의 날”(Kirchentag) 참관기

기사승인 2017.06.17  20:4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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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교 문명사회에서의 한국교회와 루터의 종교개혁 그리고 동북아 평화이슈

I. 신 냉전체제 아래서의 위기의 한반도

지금 이 글을 쓰기 위해서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에도 한반도 남쪽의 시골 마을 성주에는 미군의 새로운 미사일 방어체계인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THAAD)’의 배치에 반대하는 주민들과 평화의 일군들이 밤을 새워 농성을 벌이고 있다. 사드는 오늘날 핵무기까지 거론하며 점점 더 위협적이 되어가는 북한의 공격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그 배치를 반대하는 쪽에서는 오히려 그것은 중국과 러시아 등을 크게 자극해서 한반도를 세계 전쟁과 갈등의 두뇌처로 만들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한다.
   
이러한 논란이 본격화되기 바로 전까지 한국은 세계가 놀란 대로 거대한 촛불 혁명을 겪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누적된 신자유주의, 경제제일주의 보수정권의 불의와 폐해에 대해서 시민들은 촛불을 들었고, 매주 토요일마다 전국에서 수백만까지 모이는 평화시위를 통해서 마침내 박근혜 전 대통령을 탄핵시키고 새로운 민주정부를 창출해 냈다. 하지만 이 일이 있기 전 2014년 4월 16일 한국 사회는 그 근현대사를 가르는 큰 사건을 겪었는데, 바로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는 단원고 학생 등 500여명을 태운 페리호가 이유를 알 수 없는 원인으로 한국 서해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하여 307명의 희생자를 낸 세월호 참사를 말한다. 
   
한국 교회는 이러한 모든 한국 사회 소용돌이의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주시하다시피  한국 교회는 20세기에 들어서 늦게 시작되었지만 세계 선교사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크게 성장했다. 오늘 세계 대형교회들의 반 정도가 한국에 있고, 지금 한국은 세계에서 해외 선교사를 가장 많이 보내는 나라 중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큰 성장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에서의 기독교에 대한 사회적 신뢰도나 호감도는 점점 더 떨어지고 있다. 이것은 교회가 점점 더 보수화되고, 천민자본주의의 물질주의에 물들어 가면서 자신의 본래적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한국 교회는 대형교회일수록 위의 세 가지 사안들에 대해서 매우 보수주의적으로 대응했고, 친정부와 권력 지향적이었으며, 특히 북한과의 관계에서 평화와 통일보다는 갈등관계를 더 부추기는 행보를 해왔다. 이러한 한국교회에서 요즈음 젊은 세대들의 이탈이 두드러지며, 교회세습이나 남성 성직자들의 성적 타락, 권력독점 등 폐해가 심각하다. 
   
본 성찰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한국 교회의 변화 가능성을 특히 올해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여 루터 종교개혁 3대 원리와 견주어 살펴보고자 한다. 지금까지 한국 교회는 서구로부터 전해 받은 개혁의 원리들을 나름대로 충실히 이행해 왔다. 하지만 지금은 분명 한계상황에 도달했고, 그래서 다시 그 처음을 돌아보고자 한다. 처음 한국이 서구로부터 기독교 복음을 받아들이던 때는 이 땅에서 오래된 유교 문명이 심하게 퇴락해 있던 때였다. 그래서 기독교 복음을 받아들인다고 하는 것은 곧 자신의 오랜 유교 전통과 과거로부터의 결별과 부정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 한국 사회와 교회의 현실에서도 보듯이 서구 기독교 문명이 전해준 삶의 원리들이 더 이상 잘 기능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이 처음 기반으로서의 유교 문명과 다시 대화하고자 한다. 특히 이 일은 오늘 인류 문명이 함께 처한 현실에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앞으로 세계 인류의 삶은 서구 기독교 문명의 대변자 격인 미국과 그 대응으로서 유교 문명의 중국이 어떻게 만나 서로 관계하는가에 따라서 크게 좌우될 것이기 때문이다. 즉 유교와 기독교 문명의 만남으로서의 한국 교회의 모습이 어떻게 달라지는가가 세계교회와 평화를 위해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II. 聖, 초월(神)의 새 이름과 ‘통합성’의 영성-‘오직 믿음으로(sola fide)’의 재해석        

주지하듯이 로마교회의 충실한 성직자였던 마틴 루터가 교회의 근본적인 개혁을 외친 데에는 당시 교회의 면죄부 판매라는 큰 부패가 있었다. 루터가 1517년 95개조 테제들을 발표하면서 직접 접한 면죄부는 교황 율리우스 2세가 공포한 ‘희년 면죄부’(the jubilee indulgence)였다. 나는 당시 가톨릭교회가 ‘구원’을 빙자하여서 ‘면죄부 판매’를 강요하던 논리가 오늘 21세기 세계 신자유주의 다국적 기업시대의 세속사회에서는 세계의 강대국들이 ‘평화’를 명목으로 자신들이 개발한 신식 무기들을  팔려는 논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지금 한반도는 미국산 사드 배치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고, 얼마 전 트럼프 대통령은 그 사드 비용으로 10억 달러를 언급했다. 
   
이러한 모든 상황을 염두에 두면서 나는 오늘 한국 교회 타락과 부패의 가장 큰 요인으로 神과 거룩의 독점을 들고자 한다. 한국 기독교는 서구로부터 전해 받은 기독교 본래의 유일신적 특성에 더해서 강대국들에 대한 한국인 숭배가 보태져서 매우 제국주의적이고 절대주의적인 모습을 보여왔다. 그래서 거기서의 ‘하나님’ 이해와 그리스도 이해는 아주 배타적이었다. 오늘 한국 교회의 현실에서 보듯이 그 배타주의는 하늘을 찌르고, 남성 지도자들의 공동체 독점과 타락은 날로 증가하며, 교회 내에서의 반지성(反知性)은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나는 한국 교회가 이 상황을 개혁하기 위해서 세상 전체를, 모든 사람을, 여남 모두와 교회 밖 전체를 무조건적으로 ‘거룩’(聖/神)의 영역으로 선포하고 발견하는 일을 우선적으로 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 한국 교회의 본바탕이기도 했던 유교 전통과의 대화가 매우 큰 도움이 된다고 본다. 왜냐하면 유교 도는 이 세상 전체를 훨씬 더 통전적으로 ‘하늘’(天/聖/仁)과 직접 맞닿아 있는 것으로 파악하기 때문이다. 특히 거기서의 心 이해는 그 안에 모든 것을 담고 있는 하늘의 보고(寶庫)로 보아서 끊임없이 ‘반구저기’(反求諸己, 돌아보아 자신에게서 구하라)를 말하고, 개별적 인간 하나 하나(人)를 “인간성 자체”(仁也者)로 파악하며 (하늘의) 道도 그와 다른 것이 아니라고 강조하기 때문이다(仁也者人也. 合而言之道也.『맹자』진심下, 16). 즉 유교적 초월은 매우 내재신적이고, 간세상적(間世上的)인데, 나는 오늘 인류의 문명은 이러한 내재신적인 선험성을 더욱 요구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신약성서를 통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도 이 땅에 와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먼저 조건 없이 ‘하나님의 자녀’로 선포한 것을 읽을 수 있다. 그래서 그는 기존의 거룩의 구분에 목을 매며 온갖 이득을 취해온 바리새인들과 권력자들을 그렇게 비난한 것이다. 또한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의 제1원리로 삼은 ‘오직 믿음으로’이라는 것도 잘 생각해 보면 우선은 인간 ‘마음(心)’에 집중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인간 누구나가 가지고 있는 ‘보편’인 마음의 힘(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지 어떤 특수한 사람들이 내세우는 ‘특수’로 얻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그렇게 하나님은 당신의 구원과 은총을 온 사람들에게 고루 나누어주기를 원하신다는 표현을 루터는 ‘오직 믿음으로’라는 언술로 표현하면서 자신의 개혁을 시작한 것이라고 나는 이해한다. 
  
하지만 이 하나님의 진실이 인간 언어에 다시 갇히고 고착되면서 ‘오직 믿음으로’의 언어는 다시 사람들을 차별하고, 안과 밖으로 나누고, 기독인의 신앙을 한없이 폐쇄된 자아관념과 이데올로기에 갇히게 했다. 그래서 우리는 제2의 종교개혁을 말하면서 이 ‘오직 믿음으로의’ 언어를 새롭게 하기를 원한다. 그 개혁의 길로서 한국 유교 전통이 깊이 있게 성찰해온 ‘천지생물지심’(天地生物之心, 천지의 낳고 살리는 마음)으로서의 인간 마음에 대한 신뢰를 다시 생각해 본다. 그것은 인간 모두의 본래 마음 안에 “따뜻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만물을 이롭게 하는 마음”을 간직하고 태어나는 것을 밝혀주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이 마음을 “각자의 마음으로 삼아서”(而人之所得以爲心) 태어난다는 것이고, 한국 성리학자 퇴계는 이 마음이 천지의 “낳고 살리는 따뜻한 사랑의 원리이고, 仁의 본체”((所謂生之性, 愛之理, 仁之體也. 『聖學十圖』「제7 인설도(仁說圖)」)라고 강조했다.

나는 이 마음을 특히 한국 여성들이 자신들의 오랜 종교․문화 전통과 역사에서 ‘생명’과 ‘살림’의 ‘통합성’의 영성으로 잘 가꾸어왔다고 보는데, 이 생명과 살림의 영성은 오늘 한국 교회의 여러 혁신운동을 통해서도 활발히 역할하고 있고, 특히 세월호 참사 현장이나 한국적 ‘작은교회 운동’ 등에서 이제 초월(신)의 이름을 보다 성속 통합적이고 넓고 평등하게 온 세상을 포괄하는 ‘성(聖)’으로 부를 것을 제안하면서 그 ‘거룩’(聖)의 신성을 모두에게 인정하는 “聖의 평범성의 확대”를 주창하고 있다. 히브리 전통의 ‘하나님’이라는 이름보다 성(聖)이라는 보편적 이름이 더욱 넓고 평등하게 온 세상을 ‘신의 영역’(le milieu divin)으로 감지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III. 性, 참된 인간성(身)의 근거와 ‘타자성’의 영성-‘오직 은총으로’(sola gratia)의 참 의미 

마틴 루터의 또 다른 종교개혁의 원리 ‘오직 은총으로(sola gratia)’는 구원에서의 하나님의 선재성을 강하게 지시하는 언어이다. 그것은 우리가 자유로운 이유는 스스로의 의지가 아니라 앞서 선험적으로 주어진 자유로 인해서 자유로운 존재라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오직 은총으로’라는 말로 표현하며, 이 은총이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허락되는 것을 믿는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오늘 한국 교회의 현실에서 이 언어는 많이 왜곡되어 있다. 남성 성직자들의 은총의 독점은 물론이려니와 그와 반대로 은총이 너무 값싼 것이 되어서 ‘영의 분별’ 문제가 대두되었다. 이것은 한국 사회뿐 아니라 교회에서 ‘권위’가 심각하게 문제시 되었다는 것이고, 이 ‘오직 은총으로’의 원리가 잘못하면 근대 자아의 자기중심성과 유아독존성을 더 부채질하는 결과를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동아시아의 유교 전통은 끊임없이 인간 삶의 상대성과 조건성을 말한다.  인간성이란 바로 ‘관계’(仁)이며, 그 인간성의 체득은 결코 홀로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삶의 다원성의 인정을 통해서, 거기서 스스로를 공적 인간으로 드러내면서 가능해지는 일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또한 그 관계성의 핵심인 인간 ‘말’에 대해서 『역경(易經)』의 ‘집’(家)의 의미를 다루는 ‘풍화가인’(風化家人)은 참된 인간이라면 “그 말이 항상 ‘사실’(物)에 근거해야 하고, 그 행위에는 언제나 ‘원칙’(恒)이 있어야 한다”(君子以 言有物而行有恒)고 강조한다. 그것은 유교 도가 세상 존재와 평화의 구현을 ‘가정’(家人) 위에 두면서 인간 말에서의 진실과 바르게 체화된 행실을 평천하(平天下)의 기초적 근거로 삼는 것을 밝혀준다. 하지만 오늘 한국 사회와 교회의 현실을 보면 자아에 의한 사실의 왜곡과 거짓은 도를 넘었고, 부패한 상상과 가상의 언어가 난무하고, 상식(恒)과 원칙, 합의가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이다. 이것은 오늘 우리 시대의 ‘권위’(authority) 붕괴와 깊이 관련이 있고, 우리 시대의 많은 ‘사이비’ 주체들의 행태가 보여주듯이 그들 스스로에게는 삶에서 ‘남겨진’, 또는 범해서는 안 되는 타자와 세계의 영역(거룩)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음을 말해 준다. 
   
그렇지만 20세기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권위’(authority)라는 단어가 라틴어 ‘augere'(증진시키다, 증대시키다)에서 왔다는 것을 지시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한 개인에게서도 그렇고 사회와 국가공동체에 있어서 권위는 그 개인과 공동체의 삶을 구체적으로 돕고, 증진시키고, 전개시켰을 때 기꺼이 주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오늘 한국 교회가한국인들의 삶에서 권위가 되지 못하고,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그 교회가 구체적으로 사람들의 삶을 증진시키고 북돋아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착취하고, 노동을 부가시키고, 참된 성장과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데 길을 막고 답을 주지 못하는 것을 말하는데, 오늘 한국 교회 지도자들이 추락하는 권위를 놓지 않으려고 붙잡는 언어가 바로 ‘오직 은총으로’의 언어인 것이다. 그 언어로 그들은 자신들만이 ‘은총’을 독점하고, ‘은총’을 받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또한 자신들만이 ‘영적’이라고 외치면서 교회안과 밖을 더 견고하게 나누고, 신도들을, 특히 여성 신도들을 억압과 우민화, 심지어는 성적으로 노리개 삼으면서 사슬에 묶어두려고 한다.
   
한국 교회의 에큐메니칼 혁신운동으로서의 ‘작은교회 운동’은 그래서 그 한 모토로서 ‘탈성별’을 말하면서 지금까지 유교적 삶뿐 아니라 기독교 교회사 안에서 억눌려져 왔고, 속(俗)되고,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져 온 여/성(性)의 존재론적 가치를 새롭게 의미화하고자 한다. 유교 전통에서의 ‘性’이라는 단어는 원래 오늘 서구적 근대 물질주의 시대에 통상적으로  주로 부정적인 톤에서 ‘섹슈얼리티’나 ‘섹스’의 의미로 이해되고 있는 것과는 아주 다르다. 특히 신유교 전통에서 그 신유교를 ‘성리학’(性理學)이라고 부르는 데서도 나타나듯이 ‘性’이란 원래 마음 심(心) 자의 ‘忄’과 낳고 살리는 의미의 ‘生’이 결합된 언어로 하늘의 도인 ‘理’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거룩’(聖)이고, 초월이며, 인간 속에 내재한 선험성이다. 그것은 먼저 깊은 ‘공감력’(仁)이고, 감수성이며, 사고와 지성으로 전개되기 이전의 마음의 선한 감정(사단칠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

한국 신유교 전통 중에서도 이렇게 우리 몸(身)과 性(섹슈얼리티), 물(物)에 대한 이해를 다르게 하는 경우가 특히 조선의 성리학자 정하곡(霞谷 鄭齊斗, 1669-1736)에게서 나타난다. 그는 우리 내면의 천리(天理)인 性을 다시 ‘생리’(生理), 즉 ‘살아있고, 살리는 이치’로 표현하였는데, 이 생리라는 단어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여성들의 ‘달거리’(menstruation)를 표현하는 데도 그대로 쓰이는 것을 보면, 여성의 몸과 성을 속되고 비천한 것으로 보면서 그것을 오직 정신없는 물질로 천시하는 일은 오류이고 단견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다원성과 관계성의 인간 삶에서 중심에 있는 권위와 권력의 주체가 ‘타자’라고 지목하면서 소외시켜 오던 대상을 다시 복권시키는 일을 ‘義’라고 한다면,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義도 이와 같이 소외되었던 ‘타자’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즉 지금까지 우리의 관행과 관습에 의해서, 또는 무지와 오해에 의해서 타자로 배척받아온 대상과 분야에 대한 인정, 즉 ‘타자성’의 실천인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세속의 시대에 우리가 진정으로 사이비 은총이 아닌 우리 삶을 살찌우고, 성장시키고, 가능하게 해주는 참된 은총과 은혜를 어디에서 만날 수 있을까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우선적으로 우리 가족적 삶, 특히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서가 아닐까? 다르게 말하면 진정으로 권위가 무엇이고, 그에 대한 인정으로 타자와 타인의 존재를 인정할 수 있는 인간성을 배우는 관계는 먼저 부모와의 관계에서, 가족적 삶으로부터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교회는 우선 한국 사회의 무너져가는 가족적 삶을 다시 회복하는 일에 힘을 쏟아야 한다. 물론 여기서 우리 가족적 삶의 형태와 모습도 예전의 것과 많이 다를 것이고, 달라져야 하지만 그 다양성의 수용 가운데서도 우리가 잃어버려서는 안되는 것은 어떻게든지 인간적 삶이 밀접한 관계의 망에서 친밀한 관계를 지속해 나갈 수 있도록 하는 일이고, 이 일에서 교회 스스로도 또 하나의 큰 가족공동체로 역할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일찍이 유교와의 대화로 ‘효자(孝子) 그리스도론’을 말한 윤성범 선생의 이야기는 의미 있다. 그는 예수의 삶과 의식을 동아시아적 효의 관점으로 보아서 예수야말로 참으로 큰 효자(“예수는 모름지기 효자다”)였으며, 그의 믿음이란 바로 하늘 아버지에 대한 효였고, 그것이 그의 모든 활동의 근거였다고 밝힌다. 그는 기독교가 원래 동양 종교였던 가족과 공동체 중심의 유대교에 근거하는 것임을 상기시키면서 서구 기독교와 교회가 이렇게 몸과 공동체 안에서 경험되는 참된 은총의 윤리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 타락이 시작되었다고 일갈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는 이번 세월호 참사와 관련한 저항과 그 일의 지속이 특히 유족들의 가족사랑, 그 중에서도 유족 엄마들의 끈기와 노력, 그들의 자식을 향한 끝 모르는 사랑이  그 토대였다고 말하고자 한다. 이 참사 앞에서 대부분의 한국 대형교회들은 유족들을 외면했고, 그들의 고통과 아픔을 왜곡했으며, 오히려 교회 밖으로 내i고자 했다. 하지만 유족들은 그 모든 것들을 견뎌내며 나중에는 그들 스스로가 오히려 기존 교회와 한국 사회의 허위와 거짓에 항거하면서 굳건한 저항의 주체로 거듭났다. 그래서 거기에서 촉발되어 촛불혁명이 일어나 계속될 수 있었으며, 마침내 적폐의 정권을 무너뜨리는 일도 가능해졌다. 이 모든 일들이 그들의 가족 사랑과 어머니와 자식 간의 신뢰와 믿음, 그래서 어떻게든 진실을 밝혀내서 다시는 이러한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려는 그들의 일깨워진 공적 의식이었다. 이들은 그 깨어난 의식으로 기존 신학과 교회의 허위와 행위 없음을 고발하며 교회 밖으로 나갔고, 그래서 한국 신학은 이제 ‘세월호 이후’ 신학을 말하고, 이름 없던 민중 어머니들과 가족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어떻게 우리 시대에 다시 새로운 그리스도가 탄생되고, 새로운 부활이 일어나는지를 상상한다.

IV. 誠, 우리 신앙(信)의 참된 열매와 ‘지속성’의 영성-‘오직 성서로만’(sola scriptura)의 재구성

21세기 신자유주의 경제제일주의는 한국 사회뿐 아니라 한국 교회를 온통 무차별적으로 점령했다. 그 가운데서 한국 교회는 그 큰 규모와 외형적 편재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를 건강하게 이끄는 사회적 리더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지 못하다. 오히려 현실의 삶에서 기독인들은 “실질적인 무신론자”가 되어서 시대의 풍조에 편승하거나 그 물질주의를 더 부채질하면서 살아간다. 그런 가운데서 한국 개신교는 다른 세계 교회와의 차이나 구별점을 말할 때 빈번히 ‘성령’(the Holy Spirit)을 거론한다. 한국 교회는 ‘영적’이고, 성령의 활동을 중시하고, 성령의 개별적 체험을 강조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한국 교회에서의 이러한 성령에 대한 강조에도 불구하고 앞에서 지적한 대로 왜 그 성령의 체험이 건강한 사회적 실천력과 윤리력, 지속적으로 한국 사회와 문화를 바꾸는 문화적 영성의 힘으로 자라나지 못할까? 나는 그 연유가 한국 교회의 단차원적인 ‘성령’ 이해와 거기서의 폐쇄성과 경직성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본다. 그래서 그 대안과 보완으로서 유교와의 대화로부터 ‘誠’의 언어를 가져와서 그것을 한국적 성령론으로 풀고자 한다.

유교『중용(中庸)』은 한 마디로 “誠은 하늘의 도이고, 그 誠을 수행하는 일은 인간의 도”(誠者 天之道也, 誠之者 人之道也.『중용』20)라는 말로 하늘의 본체를 誠으로, 인간의 역할을 그 誠을 실천하는 일로 삼고 있다. 앞에서 이야기한 윤성범 신학은 이 誠을 요한복음의 ‘말씀(言)이 육신이 되었다(成)’의 뜻으로 기독론적으로 풀고 있지만 나는 오히려 한국적 성령론으로 삼고자 한다. 왜냐하면 오늘 영의 만연의 시대에 그 영이 참된 영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시금석은 그 영의 열매여부와 또한 거기서의 지속성이 관건이 되기 때문이다.『중용』은 “성은 스스로 이루는 것이요”(誠者自成也), “만물의 마침과 시작으로서 성이 없으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고”(誠者物之終始 無誠無物), 그래서 “지극한 정성은 쉼이 없다”(至誠無息) 등의 언술로 하늘의 도로서 誠을 바로 ‘진실성’과 ‘성실성(실천력)’, ‘지속력’ 등으로 풀어내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의 함석헌 선생도 앞으로 새 시대 미래의 종교는 단순한 값싼 대속의 신앙이 아니라 “노력의 종교”가 될 것이고, 그것은 좁게 이해된 성령체험(“법열”)보다는 진실성과 성실성(“참”)을 귀하게 여기면서 “믿음은 곧 그대로 생활인 것”으로서의 참 신앙을 말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주지하듯이 한국교회는 ‘오직 성서로만’이라는 종교개혁의 모토를 축자영감설과 문자주의, 이웃종교에 대한 배타주의 등으로 풀어내면서 많은 경직과 보수주의적 근본주의로 빠져들었다. 하지만 모두가 알듯이 루터가 당시 가톨릭교회의 개혁을 다시 ‘성서’로 돌아가는 일을 통해서 이루고자 한 배경에는 그 시대의 현학주의와 지적 엘리트주의, 실천과 실학과 멀어진 현란한 주지주의가 있었다. 그래서 일부 소수의 성직자가 성서를 독점하고 그 지식과 열매를 독차지하자 성서를 당시의 민중 언어인 독일어로 번역하여 독점된 역할과 열매를 사람들에게 고루 나누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 한국 교회에서는 루터의 이 구호가 다시 지독한 배타의 언어가 되어서 인간 지성을 억누르고, 남성 성직자가 설교권을 독점하고, 교회와 신앙이 일반 교육과 학교, 시대의 과학적 발견과 지식들과는 전혀 무관한 것으로 치부되고 있다. 그래서 한국 교회는 시대의 지적 담론장에서 점점 소외되고, 한국의 학교 교육이 그 지독한 기능주의로 민중들에게 크나큰 고통을 야기하고 있는데도 교회는 그것을 외면하고 있다.
   
참된 영의 열매를 ‘성(誠)’으로 인식하고, 진정한 믿음(信)이란 바로 그 믿음을 세상에서 체화(embodiment)하는 일이라고 보는 한국 ‘작은교회’ 운동은 그와는 다르게 더욱 더 교회 밖으로 나가고, 세상 한가운데의 마을과 고통의 현장을 가고자 한다. 이런 이들에게 ‘성서’란 단지 한 시기에 특별한 문자로 고정된 기독교 성경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세상 전체가 하나님의 성경이고, 우리 마음의 내밀한 움직임이 또 다른 성서이며, 이웃 종교들의 성경이 우리의 텍스트도 될 수 있음을 받아들인다. 최근에 세월호 희생자의 엄마 박은희 전도사는 고백하기를, “참사 이후 한동안 성경을 보지 못하다가 어렵게 다시 성경을 보게 됐어요. 다시 본 성경은 더 이상 Text가 아니라 현장(Context)이더라고요, 그리고 내 삶이 Text였구요. ... 그 후로 성경 말씀이 생생하게 다가왔어요”라고 한다. 이러한 선언은 우리의 인습적인 책 이해와 經이해가 어떻게 전복될 수 있는지를 잘 드러내주고, 이것으로 어쩌면 이제 우리는 모두 각자의 경(經)을 나름대로 써나가는 일을 수행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즉 스스로가 성경의 저자가 되는 일을 말한다. 
   
이렇게 세상의 모든 영역을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는 현장과 성서와 텍스트로 보는 탈성장의 誠의 영성은 ‘지속성’의 영성이다. 그것은 하늘의 뜻이 이루어질 때까지 그만두지 않는 ‘지극한 성실성’(至誠不息)이므로 외양은 비록 약해 보이지만 결코 미약하지 않다. 오히려 끝까지 지속함으로써 일을 이루어내는 성령의 일이고, 하늘의 방식이며, 여성적 ‘곤도’(坤道)의 일로서 일을 성취하는 영이다. 일찍이 유럽 계몽주의 사회에서 페스탈로치(1746-1827)는 프랑스 대혁명 전후의 유럽사회의 전개를 고민하면서 『리엔하르트와 게르투르드(Lienhard und Gertrud)』라는 농민소설을 썼다. 거기서 그는 한 마을과 국가, 유럽 사회 전체가 진정으로 개혁되기 위해서 어떻게 종교와 정치, 교육이 서로 관계 맺어야 하는지를 고민하면서 가난하고 비천한 가정의 게르투르드라는 한 평범한 주부의 체화된 지혜와 용기에 주목하였다. 그는 원래 혁명 전에 쓴 이 소설을 혁명후의 혼란과 소용돌이를 겪는 가운데 계속 고쳐나갔는데, 거기서 신앙과 물질적 안녕의 관계, 학교와 교회 목사의 역할, 정치와 신앙의 문제, 지도자의 권위와 민중, 기도하는 일과 노동하는 일의 균형 등, 무엇이 진정으로 인간 삶과 공동체의 삶을 행복하게 하며, 감사와 은총을 깨닫게 하면서 내면의 참된 안정과 기쁨, 순진과 무구로 이끄는지를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나는 오늘 한국 교회와 사회가 처한 현실도 그의 시대와 많이 견주어 볼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우리의 성찰도 이러한 주제들을 계속 살펴야 한다고 본다. 그러면서 앞에서 들었던 유교 『역경』의 가정괘인 ‘풍화가인’(風火家人)괘를 다시 살펴보면, ‘바람’(風)은 ‘불’(火)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을 지시하는데, 즉 성령의 바람은 뜨거움, 사랑에서부터 나오는 것이고, 다음 세대에게 걸 수 있는 희망(바람)은 그들에게 쏟은 사랑(불)으로 인해서 가능해진다는 지적이겠다. 오늘 우리 누구나가 서로 가까이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가족과 같은 공동체 속에서 살도록 하는 일, 자라나는 세대의 모두에게 오늘의 사랑을 나누어줄 수 있는 따뜻한 삶의 반경을 마련해 주는 일, 그 일이 가장 중요한 출발이고 긴요한 일이라는 메시지라고 여긴다. 오늘 한국 사회와 우리 교회가 어떻게 이 일에 힘쓰고 애쓸까를 생각하는 일을 통해서 나는 한국 교회 개혁과 사회 혁신의 많은 것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V. 마무리하는 말-한국 사회와 교회를 통한 제2의 종교개혁과 독일교회

나는 유교를 일종의 ‘세속종교’(a secular religion) 또는 ‘보편종교’(a common religion)로 이해하면서 그것의 특징인 ‘가장 적게 종교적이면서도 풍성하게 영적인’ 특성이 오늘 우리의 세속 사회에서, 특히 포스트모던과 포스트휴먼을 말하며 근대의 탈신화화를 넘어서 다시 새로운 재신화화를 탐색하는 우리 시대에 줄 것이 많다고 생각한다. 한국 교회와 사회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이 ‘세속 영성’(a lay spirituality)인 유교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지극한 내재신적 영성과 구체적인 몸의 수행과 가족적 삶을 평천하의 출발점으로 삼는 일, 온 세상의 일을 공(公)의 시각에서 살피면서(天下爲公) 각자가 자신의 책을 쓸 수 있을 정도로 학문과 배움을 중시하는 호학주의의 성실성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면면 속의 한국인은 그래서 배우지 못한 것을 제일의 한으로 여긴다. 자식들의 공부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온 가족이 힘을 합해서 그 일을 위해 희생하는 일은 다반사다. 세계에서 대학진학률이 제일 높고, 오늘날도 예를 들어 칸트의 번역서가 제일 많이 팔리는 나라, 학문을 통한 입신양명에 관한 수많은 에피소드가 매일 신문을 장식하는 나라이다. 나는 오늘 한국이 그 지난한 압축적 근대화 과정을 겪고서도 촛불혁명으로 새로운 민주주의를 이루어 나가고, 민중들의 손으로 새 정부를 수립할 수 있는 것도 이러한 호학 정신과 인간 의식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수백만이 평화롭게 모여서 한 손에는 촛불을 들고 다른 한 손에서 스마트폰을 들고서 그 자리에서도 서로 소통하면서 한목소리로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켜가는 민중들, 그 광장에 나와서는 선한 마음으로 어떻게든 협력하고, 폭력이 일어나지 않도록 서로 경계하고, 자신들의 인간성을 한껏 드러내면서 긴 시간 동안, 겨울의 혹독한 추위도 견디면서 무려 3개월 이상의 집회를 이어나갈 수 있는 광장의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세계 민주주의 역사상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직접 참여하여서, 3개월 이상의 시간이지만 폭력사태가 일어나지 않았고, 또한 젊은 세대와 청년 세대가 그토록 열정적으로 함께 하여서 이룬 예가 없다고 세계가 감탄한다. 
   
하지만 오늘 한국의 이러한 성취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풀어야 할 난제들 또한 무수히 가지고 있다. 사드 문제와 북핵 문제, 한국 사회 안에서 여전히 골 깊게 나누어져 있는 진보와 보수의 대결, 청년 실업과 노인복지, 재벌 개혁과 빈부격차 문제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나는 한국 사회가 이 어려움들도 풀어내리라 믿는다. 기독교를 포함해서 지금까지 인류가 각처에서 다양하게 발전시켜온 대표적 종교문화 전통들을 모두 한 자리에 가지고 있는 나라, 그리고 그 전통의 삶을 참으로 생생하고 일상적으로 실행하고 있는 나라, 세계에서 인터넷 보급률이 최고이고, 가장 우수하게 소리를 담아낼 수 있다는 한글을 통해서 전 세계에서 날마다 생산되는 정보와 지식들을 빠른 시간에 섭렵하고 소화하는 민중 씨알들, 이들이 서로 협력하고 인내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오늘 한국이 마주하고 있는 문제들에는 21세기 인류가 아직 풀지 못하고 있는 이데올로기 문제, 다시 신자유주의 경제 원리와 더불어 혹독하게 등장한 제국주의 문제, 오늘날 전 세계의 갈등 현장에서 점점 더 세차게 야기되는 종교․문화의 다원성 문제, 산업화로 인한 극심한 환경 파괴의 문제 등, 인류가 가진 문제들이 거의 집약적으로 모아져 있다. 그래서 나는 세계가 앞으로 한국 사회가 어떻게 진행될지에 대해서 주목해야 하고, 거기서의 남북통일이나 평화가 왜 중요한지를 알아야 한다고 본다. 나는 이러한 문제들의 개선과 해결을 위해서 특히 이곳 독일 교회와 한국 교민들이 세계 어느 누구보다도 좋은 협력자가 될 수 있다고 본다. 통일과 복지의 사회적 삶을 먼저 이룬 선취자이기 때문이다. 

오늘 세계는 유대기독교 문명과 유교 문명의 대치로 앞으로 그 두 문명이 어떤 관계를 맺어나가는가에 따라서 많이 좌우될 것이다. 이 일에서 한국은 뛰어난 예를 보여줄 수 있다. 두 문명의 만남의 지혜를 가지고서 한국 교회는 마틴 루터의 제1의 종교개혁을 넘어서 제2의 종교개혁을 이루고자 애쓴다. 그 한 생생한 현장으로 지금 한국 땅에서 가장 한국적인 종교 원불교, 태동 시 동학과 유교의 영향을 깊이 받았고, 19세기 서구 물질주의가 물밀듯이 몰려올 때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가르침으로 서구 기독교 과학 문명과도 대화하면서 탄생한 원불교가 중심이 되어서 한반도 사드 배치에 저항하고 있다. 그 일에 가톨릭과 개신교가 함께 힘을 보태고 있는데, 나는 오늘 아무도 쉽게 맞서지 못하는 미국 제국주의의 힘에 대해서 과감히 맞서는 한국 씨알 종교인들의 이 운동이 앞으로 인류의 미래와 동북아의 평화를 위해서 어떤 의미로 전개될지 주목한다. 

 

이은선(세종대 교수)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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