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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기독교인인가

기사승인 2017.04.28  11: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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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년광장: 빨간약 or/and 파란약>

들어가며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은 그의 강연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에서 그가 기독교인이 아닌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나는 하나님과 영생을 믿지 않는다. … 또한 예수가 대단히 높은 수준의 도덕적 선을 행한 사람이라는 건 인정하지만 최선, 최현의 인간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쉽게 말해, 러셀이 기독교인이 아닌 이유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몇 가지 핵심적 명제들에 동의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마커스 보그(Marcus Borg)의 지적처럼 기독교인은 “x, y, z을 믿는” 사람이라는 식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오히려 테리 이글턴(Terry Eagleton)의 주장대로 기독교인은 “진위에 입각한 명제의 성격보다는 발화와 동시에 그 말이 나타내는 행위가 이루어지는 수행적 성격을 띤다.”

즉 기독교인은 어떠한 명제에 대한 지적인 동의와 거부가 아닌, 보다 더 깊은 차원 곧, ‘삶의 방식’에 따라 정의되고 설명된다. 다시 말해, 기독교인의 정체성은 핵심적 교리에 대한 동의와 거부가 아닌 ‘어떻게 사느냐’에 대한 행위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행위는 무엇으로 시작되고 마쳐지는가? 고리타분한 이야기일 수 있지만 그것은 바로 ‘은혜’다.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의 표현처럼 “은혜는 뒤따름을 요구”한다. 은혜에 따라 우리의 행위가 결정된다. 삼위의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허락되었을 때 우리는 “사건에 혼신을 바쳐 충실함으로써 생물학적 종의 이름 없는 구성원에서 진정한 주체로 변신한다.” 쉽게 말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 나라를 구축해가는 제자로 거듭날 수 있는 것이다. ‘은혜’, 은혜 아니고서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에 아무 이야기를 꺼낼 수가 없다.

그렇다면 은혜로 하나님 나라 구축자가 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고, 해야 하는가? 그동안 우리는 이 물음에 대해 오랫동안 침묵해왔다. 마치 하나님의 나라는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제는 매몰차게 물음표를 붙여야 한다.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의 지적처럼 “혁명의 가능성을 제공하는 것은 이와 같은 탈안정화”이다. 따라서 이러한 물음을 바탕으로 나는 기독교인의 의무와 책임, 곧 내가 기독교인인 이유를 기독교 고유의 가치인 ‘사랑’과 ‘믿음’으로 설명하려 한다.

나는 왜 기독교인인가 1: ‘사랑’

기독교에서 사랑(아가페)은 무엇인가? 존 카푸토(John Caputo)의 말처럼 “‘사랑’이란 말 속에 포함된 관념 중 하나는 그것이 보상 없이 주는 것, 과도할 정도의 사랑이라 할 만한 ‘무조건적’ 행위이다.” 그런데 이 사랑이 왜 중요한가? 이는 기독교의 무조건적 사랑이 자본 중심 구조의 질서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자본 중심 구조는 사람을 상품화하며 그것을 가격대별로 나열해놓았다. 현대사회는 스스로를 소비사회로 정의하며 ‘너는 얼마, 나는 얼마’라는 식의 사고방식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사랑은 그 구조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기독교의 사랑 곧 “아가페는 … 우리를 자본 중심의 구조에서 뽑아버리도록 분부하는 사랑 그 자체이다.” 다시 말해, 기독교에서의 사랑은 자본 중심의 사회에서 요청하는 특정한 조건이 없이도 사랑 받는 존재라는 선포(Kerygma)이다. 이렇게 사랑은 자본 중심의 구조에서 우리를 뽑아버린다. 자본 중심의 구조가 제기하는 어떠한 조건에 붙잡힐 필요가 없음을 선언하고 나아가 자본 중심의 구조를 무의미화 시키는 것이다.

즉 “비난받고 더럽던 것이 약자에서 강자가 되고, 죽음이 삶으로, 고뇌가 영광으로 바꾼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런 식으로 장애물이 주춧돌이 되면서 옛 질서의 자투리와 찌꺼기로부터 새로운 질서가 구축”된다.

논자는 이것이 고린도전서에 1장 27-28절을 통해 한층 더 깊이 드러난다고 본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택하셨으며,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비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을 택하셨으니 곧 잘났다고 하는 것들을 없애시려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나는 왜 기독교인인가 2: ‘믿음’

사랑을 통하여 인간을 구조에서 떼어놓아 구조에 의해 짓이겨지는 것을 막아냈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는 않다. 어리석음에서 지혜가 되고, 약자에서 강자가 되고, 없는 자가 있는 자로, 죽음이 삶으로 바뀌는 영광된 변모가 있으려면 하나의 가치가 더 필요하다. 바로 ‘믿음’이다.

여기서 믿음이 무엇인지 잠깐 짚을 필요가 있다. “믿음이란 본디 무엇 혹은 누군가의 존재에 대한 확신이 아니라 헌신과 충성을 뜻한다. … 우리가 처한 끔찍한 상황을 변화시킬 수도 있는 어떤 것에 대한 믿음 말이다. 현실에 관한 어떤 설명에 동조하는 것도 분명 믿음에 부수되는 일이지만, 그런 것이 믿음의 일차적 조건은 아니다. … 기독교 신앙에서 일차적인 것은 초월자인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명제에 동의하느냐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둠과 고통과 혼란 속에 허덕이며 막다른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랑에 대한 약속을 충실하게 믿고 지키는 인간들이 보여주는 헌신이다.” 다시 말해 “기독교에서 믿음은 타당성 여부나 지적 추론 혹은 어림짐작의 문제가 아니라 확실성의 문제로 여겨져 왔다. …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다.

아가페가 이룩한 하나님 나라, 즉 네가 자본을 얼마나 소유하고 있는가에 관계없이 우리 존재를 사랑하는 하나님 사랑을 체험했다면, 이제는 그 하나님 나라를 완성해가는 자로서의 삶을 살아내야 한다. 다시 말해, 자본 중심의 구조에 처절히 직면하면서 자본 중심의 현실을 거부하는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기 위하여 헌신하자는 것이다.

논의의 핵심은 이것이다. 자본 중심의 구조에서 아가페를 통해 자본의 가치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면 이제는 그 깨달음의 가치에 헌신하자는 것이다. 즉 그 깨달음을 완성해가자는 것이다. 이미 메시아는 도래했다. 이제는 메시아가 도래한 시대를 살아가는 자들의 치열한 믿음(헌신)이 필요한 때이다.

바울의 고백처럼 말이다. “나는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며, 이미 목표점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아직 그것을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몸을 내밀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점을 바라보고 달려가고 있습니다.“

나오며: 사라지는 매개자

이제 우리는 나아가야 한다. 존 스토트(John Stott)의 말처럼 “하나님이 만드셨고 하나님을 닮은 존재들이 사는 세상, 그리스도가 오셨고 이제 그리스도가 우리를 보내시는 그 세상으로 말이다. 우리가 속한 곳은 그곳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우리가 살고 사랑하고, 증거하고 섬기며,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 받고 죽어야 하는 장이다.”

그렇다면 그 장은 어디인가? 여기서 세월호를 잊을 수 없다. 세월호에서 하나님은 끝까지 남아 같이 잠기셨다. 그곳에 남은 하나님은 넘치는 사랑을 지니고 있지만 세월호와 함께 사라져버렸고 동시에 무능하다. 결국 “신은 우리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 신은 우리 없이는 무능하다. 신은 오직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해서만 행동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세월호를 기억하는 자들의 모임을 만드는 매개자의 역할을 했다. 세월호가 상징하는 시대의 아픔에 마음을 같이할 수 있는 이들을 만든 사라지는 매개자. 그렇기에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고 그 은혜로 모일 수밖에 없다.

앞으로 그 은혜가 어떤 세상을 만들어갈지 두렵지만 기대된다. 부디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하는 우리가 되길 가슴 아프게 소망한다. 한 철학자의 말을 통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예수처럼, 다만 불가능한 꿈을 지피면서, 걷고 걷다가 죽어버리십시오.”

주찬종(감신대)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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