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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 (딤전 1:12~17)

기사승인 2017.03.27  13: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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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3월 26일 사순절넷째주일설교

■ 주간 단상 : 세월호 인양

 
세월호 사고 3년 만에 수장되었던 배의 인양이 이루어졌다. 역사에 기록될 세월호 참사와 깊은 연관이 있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과 함께 권력을 상실하자마자 그렇게 오래 걸리던 인양이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이렇게 어렵지 않은 일이 그동안 무슨 이유로 그렇게 오래 걸렸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지난 3년 동안 유가족들은 눈물도 나오지 않을 정도로 고통 속에서 살았고 생업과 남은 가족도 팽개치고 날마다 진상 규명을 위해 뛰어다녔다. 그 과정에서 대부분의 유족들은 몸과 마음의 상처가 깊어지고 에너지를 고갈하여 속으로 심각한 질병과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을 것이다. 이들이 건강하기를 진심으로 기도해야 한다. 더군다나 지난 3년 동안 시신도 수습하지 못하여 장례초자 치르지 못한 미수습자 9명의 유족들은 팽목항에 삶을 저당 잡힌 채로 살아왔다. 이제 불가사의한 이 참사의 진실을 규명할 수 있는 시기가 도래했다. 단순한 항해 사고든 엄청난 권력의 비리가 숨어있든 정직한 조사를 통해 진상이 밝혀져야 한다.
 
모든 치유의 시작은 진실 규명이 최우선이다. 그리고 나서야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극복할 것인가가 가능하다. 진실이 감춰지고 의혹의 시선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는 어떤 것도 치유될 수 없다. 납득할 수 없는 것은 수용도 가능하지 않다. 이제부터 새로운 시작이니 세월호 인양을 통해 진실이 밝혀지고 유족들과 온 국민들의 상처와 지친 영혼들이 치유될 수 있도록 기도하는 교회가 되자.
 
1. 바울의 감격적 고백
 
1) 우리들 삶에 감격이 있으면 좋겠다.
 
삶에서 감격이 사라지면 인생은 너무 건조해진다. 감동은 우리의 삶을 적셔주는 생명의 단비와 같다. 힘들어 지친 삶 속에서도 가족이나 친구들의 소소한 감동을 통해 새 용기를 얻는다.
 
역사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지난 3월 10일 탄핵을 결정하는 헌법재판소장 대행의 판결문 마지막 부분에서 집단적 감격을 경험했다.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떨린다. 과연 어떤 판결이 내려질까 조마조마한 순간에 내려진 그 짜릿한 감격은 긴 겨울 동안 광화문에서 추위와 절망과 싸워온 국민의 고통과 눈물을 한순간에 보상하고도 남는 것이었다. 그렇게 중요한 역사적 판결을 위해 출근하는 헌재소장 대행의 머리에 헤어 롤이 두 개 끼어 있는 것조차도 아름답게 보일 정도였다.

우리가 기도하기는 이번 세월호 인양 작업에서도 하나님께서 지난 3년 간 끌어안고 있었던 유족들의 한을 풀고 위로해 줄 수 있는 감격을 베풀어주시기를 기도한다.
 
2) 바울은 사랑하는 신앙적 아들인 디모데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스스로 감격해하고 있다.
 
바울의 감격이 그의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진정성을 지니고 있는 것은 그가 오늘 그리스도의 직분을 맡은 사람이 된 것이 상식적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당연한 일을 만나면 감동은 크게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것이 현실이 되었을 때는 감동이 발생한다. 오늘 바울은 이 점에서 감격하고 있다. 자신은 아무리 돌아보고 다시 계산해보아도 도저히 예수 그리스도의 직분을 맡을 수 없는 사람인데 지금 어엿이 그리스도의 직분이 되었다는 것, 즉 자신의 신분 자체에 대한 감격이다. 그는 젊어서 혈기와 열정을 가지고 예수 믿는 이들을 색출하여 추방하고 투옥시키는데 온 힘을 다하였다. 그리스도와는 완전히 대척점에 서 있는 적 그리스도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청년 사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난 뒤 완전히 변화되어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직분자가 되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바울의 고백에 깊이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가 받은 최고의 축복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내가 기독교인이라는 것에 대한 자부심과 감격이 사라졌다면 내 영혼이 병들고 있다는 명확한 증거다. 곰곰이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나를 불러서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삼으신 주님의 은총을 감사하자. 새로운 삶은 여기서 시작한다.

2. 직분자로서의 사명
 
1) 바울이 획기적 전환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증언하는 것이었다.
 
주님은 이렇게 증언하는 사람을 가장 필요로 하시기에 바울을 사명자로 부르셨다. 2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하나님께서 가장 시급하게 찾는 이는 단지 착한 사람이 아니다. 실력 좋은 사람이 아니다. 뛰어난 초능력자가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선언하고 확장하는 사명을 신실하게 감당하는 사람이다. 오늘 바울은 바로 그 일에 적합한 사람으로 선택되어 사명을 맡게 된 것을 두고두고 생각할 때마다 감사하고 마음에 감격이 벅차오른다는 것이다.
 
신앙생활에는 이 샘이 있어야 한다. 인생과 신앙은 단거리가 아니다. 길고 긴 마라톤이다. 산도 넘고 물도 건너고 신나는 시기도 있지만 당장 주저앉고 싶은 때도 있고, 이제 고생 그만해도 된다고 너무나도 달콤하게 속삭이는 때도 있다. 그 때 이 믿음의 샘이 필요하다. 메말라가는 내 영혼에 다시 신앙의 새 힘을 적셔줄 수 있는 마르지 않는 샘이 필요하다. 그것이 개인의 내면적 체험이든 기도의 응답이든 사회적 변혁이든 내가 하나님을 체험한 믿음의 샘을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 바울은 사명을 감당하는 어려운 위기마다 자신의 악한 과거와 다메섹 도상에서 주를 만난 것을 되새기면서 오늘의 고난과 유혹을 이겨나갔을 것이다. 우리에게 이 감동의 샘이 필요하다.
 
2)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부름 받은 첫 번째 이유는 이 시대에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고 선언하는 일이다.
 
바울 시대에는 예수가 누군지 아는 이가 별로 없었다. 로마제국이라는 거대한 정치 상황에서 유대 땅에서도 변두리인 갈릴리 지방에서 목수로 태어난 젊은이를 안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다. 모르는 것이 더 합리적이고 당연하다. 그래서 진정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리고 증언할 사명자들이 필요했다. 그 필요에 바울이 선택받았고 그 부르심에 날마다 감격하면서 사명을 감당했다.
오늘 전 세계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는 거의 없다. 이제 기독교는 상식이 되었고 어느 곳이나 교회는 많다. 그럼에도 바울과 같은 증언자들이 필요할까? 지금이야말로 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직분자가 절실한 시기다.

지식의 발달로 스스로 신의 신비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많은 현대인들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세상엔 보이는 것이 전부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없다고까지 말하지는 않지만 논의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현대 과학의 전제는 물질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것만이 연구 대상이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없다고 부정하는 것과 똑같다.

한편 많은 교회들은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자신들의 기호에 맞게 가시관 대신 금관을 씌워 재가공한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래서 이 증언을 받아들이고 있는 많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아닌 거짓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고 있다.

이렇게 믿으니 재적 10만 명의 대형교회에서 담임목사직을 편법으로 세습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또 일부의 자칭 진보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예수님을 그저 훌륭한 지혜의 스승 정도로 여기면서 기독교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정말 예수님은 인류의 방향을 지혜롭게 제시한 인물인가? 인간의 기본 상식과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그리고 가난하고 힘든 사람들을 사랑한 도덕적 인물에 불과한가?

교회 밖이나 교회 안이나, 교회 안의 보수나 진보나 모두 오늘 바울이 목숨 걸고 외쳤던 복음, 그가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다시 새 힘을 주고 다시 일어나 옷매무새를 단정하게 했던 그 복음이 간절한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도대체 바울이 전한 복음, 오늘 우리가 다시 한번 되새기고 살려내야 할 복음은 무엇인가?

3. 죄인을 구하시려고
 
1)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왜 이 땅에 오셨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세상에 그냥 왔다가 이런 일을 했다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복음은 처음부터 분명한 목적이 있어서 세상에 그리스도가 오셨다고 선언한다. 바울은 딱 한 마디로 요약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15절)
 
죄인은 하나님으로부터 심판당할 수밖에 없는데 심판받을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가 이 땅으로 내려오셨다는 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과거 이 기독교 복음은 많은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말에 많은 이들이 관심을 드러냈다. 그것은 과거의 복음이 훨씬 세련되거나 설명을 잘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의 죄를 인식하고 있었으며 그 죄로부터의 구원을 갈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21세기 한국 사람들에게 예수 믿으면 죄인이 구원받는다고 하면 멀뚱하고 쳐다본다.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인데? 나보고 완전하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대답은 못하지만 또 죄인이냐고 물어보면 동의할 수 없다는 분위기가 일반적이다. 내가 그렇게 심각할 정도로 죄인이 아닌데 거기다가 아무리 구원의 복음을 말해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작년까지만 해도 누가 약 갖다 주면서 먹으라고 하면 고이 모셔두는 경우가 많았다. 일단 매일 약을 먹는다는 게 귀찮고 더 중요한 것은 아직 내가 뭐 그리 약을 먹을 정도로 쇠약하진 않다는 생각 때문이다. 근래 주변에 암 환자가 많이 늘었다. 가까이 계신 목사님들 중에도 암 투병 중이신 분들이 여럿 있다. 이런 것 보면서 요즘엔 집에 있는 좋은 약이란 약은 다 꺼내 놓고 먹는다. 위험을 느끼고 있고 겁도 나기 때문이다.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는 기독교 복음이 배척받지 않으려면 우리가 죄인임을 절감해야 하는데 별로 감각이 없다. 그 이유는 오늘 교회가 죄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냥 거짓말, 폭력, 사기, 비 양심, 탐욕 등 도덕적 문제로 죄를 축소시켰다. 기독교의 죄가 도덕과 무관한 것은 아니지만 도덕적 차원에 머무르지는 않는다.
 
2) 현대인의 심리를 가장 잘 표현했다고 하는 도스토예프스키는 1867년에 ‘죄와 벌’을 썼다.
 
가난한 고학생 라스콜리니코프는 동네의 악랄한 전당포집 할머니를 죽이기로 결심하고 완벽하게 모든 준비를 마친다. 답사, 무기로 도끼 구입, 도망치는 것 등 그리고 자신이 이 끔찍한 계획을 진짜로 실행할 수 있는지 실험하기 위해 전당포집 노파를 잔인하게 살해하고 멋모르고 언니네 집에 들어온 그 노파의 착한 여동생까지 죽인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말한 죄는 살인한 것이 아니다. 살인이 죄가 아니라는 것이 아니라, 살인이라는 반인간적 행위까지도 인간은 스스로 계획할 수 있고 스스로 실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죄다. 이것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가는 것이다. 러시아어에서 죄는 도를 넘어가는 것(Overstep) 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인간이 한계를 넘어서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이 죄다. 나아가 하나님이란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는 데까지 다다른다. 그래서 내가 어떤 삶을 살든지 간섭받지 않아도 되며 내 인생의 주인은 나 자신이기에 내가 생각하고 계획한대로 살아갈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죄다.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는 노파 살해를 통해 이것을 입증해보고자 했다. 배경이 어두운 것은 인간의 무의식 속에 이미 검은 혼돈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는 뜻이리라.
 
젊은이의 눈빛이 바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눈빛이다.
 
19세기에 유럽에서 시작한 이런 신사상들이 러시아로 마구 밀려들어오기 시작했다. 배운 사람들일수록, 지식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일수록 서구의 유럽 풍조에 그렇게 넘어갔다. 특히 이렇게 인간 중심적인 계획을 개인뿐 아니라 사회 전체적으로 제도화시킨 사회주의 사상이 급속도로 확산되는 것을 보면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심각한 걱정을 했으며 이러한 무신론적 인간의 위험성을 작품으로 경고했다고 한다.
 
오늘의 대한민국도 일본처럼 서구를 모델로 삼아 쫓아가기에 바쁘다. 모든 생활양식이 서구화되었고 의복과 음식은 이미 서구를 닮아가고 있고 사고방식마저도 그렇다. 그런데 우리가 그토록 닮아가려고 하는 서구의 사고방식은 이제 모든 세상의 주인은 나 자신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완전하진 않지만 더 이상 죄인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생각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고 아무리 이야기해봐야 별로 가슴에 와 닿지 않는다. 내 일이 아니고 남의 일이며 구태의연한 과거의 주장을 듣는 것처럼 심드렁하기만 하다. 여기에 무슨 감격이 있겠는가? 이것이 오늘 서구교회가 텅텅 비는 가장 중요한 이유다. 그리고 오늘 우리 사회는 그 전철을 충실하게 밟고 있다.
 
이렇게 사는 사람들의 결과는 어떻게 될까? 도스토예프스키가 그리는 이런 무신론자들, 자신이 죄인임을 의식하지 않고 하나님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말로는 둘 중의 하나다, 미치거나 자살하거나!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살을 꿈꾸며,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이반은 정신병에 걸린다.
 
3) 오늘의 세계가 이제 인간은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며 인간은 더 이상 죄인이 아니라는 생각에 사로잡혀가고 있다. 자신의 죄를 자각하지 못하는 인간은 십자가의 은총을 통한 구원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이런 시대는 미치거나 멸망하거나 둘 중의 하나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 진정한 복음을 증언할 직분자들을 안타까이 기다리고 계시며 우리들의 증언이 너무나도 소중하다. 하나님 없이 내 마음대로 살고자하는 우리는 죄인이며 죄의 결과는 죽음이기에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자이심을 선포하는 것이 필요한 시대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이 느껴지는 사람은 행복하다, 천국은 그들의 것이다!
 

이훈삼 목사 (성남 주민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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