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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페스포럼 7-2 폭력은 왜 구조화하는가 : 지라르의 폭력이론으로 본 종교

기사승인 2017.02.21  12:5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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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와 국가가 만드는 폭력>

종교인이 전 국민의 절반 이상이지만 사회가 평화롭기는커녕 폭력이 교묘하게 구조화되고 도리어 내면화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하는 제7차 “레페스포럼”(REPES Forum)에서 이찬수 교수(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종교평화학)가 “왜 폭력은 구조화하는가: 종교심보다 앞서는 모방욕망”이라는 제목으로 발제한 내용의 요약이다. 이를 통해 종교와 평화의 관계에 대해 상상해본다.

참석자:
원영상(원광대 연구교수, 일본불교학)
이관표(협성대 초빙교수, 종교철학)
이찬수(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 종교평화학/진행)
전병술(건국대 연구교수, 동양철학)
전철후(강남교당 교무, 원불교학/기록)
정주진(평화갈등연구소장, 평화학)
홍정호(연세대 객원교수, 선교신학/정리)
 
 
모방 욕망과 종교
 
게르니카 피카소
원익선: 텔레비전 르포를 시청한 일이 있다. 그 내용은 재건축이 된 아파트 앞에서 노숙하는 사람에 관한 것이었다. 그 이유를 파헤쳐보니, 자신의 집이 재개발과 관련된 일이었다. 지역의 75% 이상만 동의하면 동의하지 않은 나머지 25%는 거부했음에도 공탁금을 찾아서 집을 떠나야 한다고 한다. 25%에 속한 사람 사람들이 집을 돌려 달라, 집 때문에 가족이 풍비박산됐는데 보상해 달라 요구하지만, 변호사 말로는 법적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란다. 소수자가 어떻게 해서 생겨나는지 오늘 발제를 듣고 나니까 이런 상황이 이해가 된다. 집단이 개인을 일방적으로 몰아내는 것은 정당할까. 아주 다양한 형태로 사회가 구조적 폭력을 내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정주진: 발제 초반에 모방 욕망을 설명했는데 모방 개념만으로 폭력을 설명하는 것은 다소 위험하다는 생각이 든다. 많은 사회가 겪는 폭력성이 남이 가진 것을 나도 가지려는 모방으로 생겨난다는 것은 일부 그럴 수도 있지만 안 그런 부분도 많다. 평화갈등 이론에 의하면 인간의 기본필요를 충족시키지 못하도록 하는 것 자체가 폭력이고, 계속 필요가 충족되지 못할 때 폭력적 충돌이 발생한다.
 
모방이라고 하면 자기가 꼭 필요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갖고 싶거나 따라하고 싶은 욕망을 일컫는 것처럼 들리는데 인간의 가장 기본적 욕망인 정체성의 인정 같은 것은 모방이 아니다. 예를 들어 장애인, 성소수자, 원주민 등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인정’이라는 기본적 필요를 추구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인간의 기본필요가 거부되면 급기야 폭력적 충돌까지 생긴다. 발제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 과정에서 힘이 있는 쪽이 누구 하나를 희생양 삼아서 갈등을 잠잠하게 만든다는 말은 이해가 된다. 그런데 그것을 모방 욕망에서 비롯된 것으로 설명하는 것은 기본적인 것이 아니라 무언가 부가적인 것을 가지고 폭력을 설명한다는 느낌이 든다.
 
이찬수: 인간의 기본적인 필요라는 말은 지라르 입장에서 보면 상대적인 것이다. 상대적이라는 말은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나와 비교해보면서 나에게 부족하거나 없다고 느낀다는 뜻이다. 그래서 네가 누리고 있는 그 이상의 것을 모방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재물이든 신분이든, 무언가 필요성을 느끼는 것은 그 사물 자체를 원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사물을 누리는 어떤 이와 비교하면서, 가지고 누리는 이를 매개로 해서 생긴다는 것이다. 그것이 그이를 모방하는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모방하려 하지만 모방은 서로 간에 벌어지는 일이라, 완전히 해소되지는 않는다. 모방욕이 지속된다. 그러다가 서로에 대한, 서로를 통한 끝없는 모방욕이 갈등요소로 번지게 된다. 지라르는 인류의 역사가 실제로 그래 왔다며 여러 가지 자료나 신화 분석을 시도했다.
 
이관표: 모방이라는 것이 지라르가 썼던 초기작품의 분석 중 소설 내 주인공의 탐색이라면, 이것이 폭력과 성스러움으로 가면 두려움으로 언급되고, 후반부로 가면 자연 질서 안에서 두 가지의 똑같은 권리와 권능을 가지고 있는 서로가 싸워서 한쪽이 도태당하는 현상으로 분석된다. 저는 앞쪽에 모방쪽 보다는 짝패 본능에서 좀 더 친밀성을 가지고 지라르를 해석하고 있다. 이 개념이 자연종교의 예를 들어, 고대 근동의 종교와 정치에서는 자연 안에 속해있는 각 개체들 간의 위계질서와 먹이사슬을 그대로 모방하여 인간 삶에 적용한다. 그 질서를 따라 본다면 어쩔수 없이 누군가 누구를 먹어야 하는데 똑같은 힘을 가지고 있다면 결국 투쟁이 발생한다.
 
두려움의 극단적인 것들이 모방욕망을 통해서 나타나고 짝패 본능이 사회 공동체 안에서 극단화 되고 터지게 되는 데 사람들이 견디지 못하게 되는 것이 자연질서 안에서 가장 밑바닥에 있는 노예 혹은 가난하고 불쌍한 자, 이방인 등을 발견하게 되고, 그들에게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또 다른 평화를 찾는다는 논리가 여기 들어와 있다. 저는 이 이론들이 유대교의 유일신론이 탄생했던 중요한 매카니즘인 것 같다. 합비루라는 노예계급이 일으킨 폭력에 대한 저항이 바로 모세종교이며, 이것은 기독교의 유일신론으로까지 내려오고 있다.
 
이찬수: 그래서 지라르에 의하면 고대인들은 쌍둥이를 불길한 징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똑같이 태어났기 때문에 누군가 다른 하나를 제거하려 든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해야 모방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이 많은 신화들에서 공통적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원익선: 카프카의 ‘성(城)’이라는 소설을 보면 끊임없이 성의 중심부에 들어가려고 몸부림 치는데 결국 주변부에 머무르면서 끝난다. 그걸 보면 끊임없이 모방하고 중심부에 들어가려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자기소외를 가져가는 부분과 비슷하지 않나. 자기소외와 모방이 순환을 통해서 결국은 중심부와 주변부로 나누어지고, 그 과정에서 폭력으로 연결되는 것 같다. 카프카는 이러한 점을 통해 현대 사회의 폭력구조를 비판하고 있다.
 
지라르는 왜 기독교인이 되었나
 
전병술: 지라르가 주로 기독교 이론을 주제로 자신의 모방이론을 펼치는가, 아니면 발제자가 지라르의 이론을 빌려 기독교 이야기를 하는 건가?
 
이찬수: 지라르는 나중에 자신의 종교적 정체성을 기독교인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처음부터 기독교인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희생양에 관한 연구를 하다가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인류가 폭력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잘 보여주었다는 사실을 중시하며 스스로 기독교인의 길로 들어섰다. 그런데 신학 특히 성서학 연구자의 눈으로 보면, 그가 다소 무리하게 기독교의 전통적 성서 언어를 다른 언어에 비해 강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가령 지라르는 기독교의 십계명 가운데 열 번째 계명(“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못한다. 네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소나 나귀 할 것 없이 네 이웃의 소유는 무엇이든지 탐내지 못한다.”)을 중시한다. 그에 의하면 앞의 네 계명(살인하지 못한다. 간음하지 못한다. 도둑질하지 못한다. 이웃에게 불리한 거짓 증언을 못한다.)은 어떤 ‘행위’를 금하는 데 비해, 열 번째 계명은 어떤 ‘욕망’을 금한다. 십계명의 입법자는 이웃의 소유에 대한 욕망을 금하면서 인간 사회의 제일 중요한 문제, 즉 내적 폭력을 해결하려고 애쓰고 있다는 것이다. 그 계명은 이웃의 소유를 욕망하는 그런 ‘이웃 숭배’ 안에 숨겨있는 ‘자신 숭배’를 폭로함으로써, 폭력을 주체적으로 줄이려는 시도라는 지라르는 해석했다.
 
다른 예로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고 피할 수도 있었는데, 폭력에 폭력으로 저항하지 않고, 폭력적 구조 속으로 들어가 폭력을 폭로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차원을 드러냈다고 그는 본다. 이런 식으로 인류의 폭력적 구조를 드러낸 결정적인 사례를 기독교 전통에서 찾는 경향이 있다. 기독교가 폭력의 구조를 가장 잘 폭로했으며, 그렇게 한 예수에게서 인류 최후의 희망을 찾는다는 것이다.
 
정주진: 지라르가 성서를 문자 그래도 보고 해석한 것 같다. 남의 것을 탐낼 수 있는 정도면 남의 것을 뺏을 수 있을 힘이 있는 정도이다. 행동으로 연결될 가능성을 전제로 하고 ‘탐내지 말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단순히 욕망이 아니라 그로 인한 행동을 제재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찬수: 지라르는 행동보다 행동의 동기가 되는 욕망에 연구의 초점을 두었다. 특히 무엇을 욕망하는가를 중시했다. 사람을 욕망하는 것 보다는 사람이 소유해서 누리고 있는 어떤 것이 욕망의 대상이다. 사람은 매개자가 되고, 매개자가 누리고 있는 것이 욕망의 대상이 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주로 상대방이 누리는 돈, 엄밀히 말하면 자본을 욕망하면서 자본이 사회를 돌리는 동력이 된다. 어떻든 지라르는 행동을 제재하기보다는 욕망을 제재하는 쪽에 초점을 두었다.
 
원익선: 돈을 설명하는 것은 납득이 간다. 원시 사회에서는 귤하고 물을 교환할 때 축적이 되어 있어야 하는 데 지금은 축적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소유가 가능하다. 그 소유를 돈으로 환원시키는데, 돈을 소유하려는 모방 심리가 끊임없는 경쟁으로 내모는 것이 아닌가 한다. 욕망에 관한 부분은 불교와 원불교와 비슷한 맥락이 있다. 계문을 살펴보면 최종적인 계문은 탐진치와 관련된다. 원불교도 탐진치를 넘어서면 성인의 반열에 올라선다고 말한다. 탐은 욕망이고, 진은 상대방에게 화내는 것이고, 치는 어리석음을 말한다. 욕망을 끊임없이 추구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치이다. 이것이 연쇄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결국은 자아의 문제이다. 화내는 것은 타자와의 관계 문제이기도 하지만 결국 탐은 외부에 있는 것을 소유하려는 것이다. 소유하려 하지만 결국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명이라 한다. 치의 반대이다. 지라르와 욕망 이론에 입각해서 보면, 욕망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데까지 가줘야 불성에 대한 현현이 이루어진다.
 
르네 지라르
욕망의 환원구조와 원불교
 
홍정호: 욕망이라는 낱말의 어감이 다소 부정적이다. 원 교무님 말씀하신 탐진치도 욕망에서 비롯되지만, 그걸 소멸하려는 노력도 욕망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욕망 그 자체가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문제는 욕망의 동일한 환원 구조다. 욕망을 단 하나의 목적으로 환원시키는, 이를 테면 자본주의의 물화된 생활양식을 욕망의 유일한 대상으로 삼도록 만드는 그 동일성의 환원 구조를 문제 삼아야 한다고 본다. 욕망의 대상이 숫자로 환원 불가능한 가치들에 대한 추구로 다원화 되도록 노력하는 게 욕망 그 자체와 씨름하는 것보다 더 필요한 일이 아닌가 싶다.  
 
원익선: 그 점은 원불교의 창시자인 소태산 박중빈(1893-1943)의 언설에서는 명료하게 드러난다. 나에게 욕망이 일어나는 것을 감추거나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 욕망을 키우라고 한다. 나에 대한 작은 욕망을 인류 전체를 위한 욕망으로 키워야 한다고 말한다. 불교적으로 볼 때는 다소 이론적인 설명이 필요하다. 그 내용은 사회적 연기라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불타가 깨달은 것을 인간의 자연적이고 본질적인 연기(緣起)라고 칭한다면, 인간적인 관계에서 볼 때는 사회적 연기로 볼 수 있다. 불타가 보는 자연적인 연기는 무상(無常)과 고(苦)를 발생케 한다. 쉼 없이 생성되었다가 소멸되는 가운데 인간은 존재의 순간순간의 나타남에 집착하기 때문에 고통이 생긴다. 그 본질이 잡을 수 없는 무아(無我)임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삶과 죽음이 연속되는 인간의 한계상황 속에서는 사회적으로 서로 의존해 있다고 볼 수 있으며, 이것을 사회적 연기라고 말할 수 있다.
 
사회적 연기의 입장에서 보면 불교에서 이야기 하는 상생(相生)은 서로서로 살려준다는 의미이다. 대승불교에서는 사랑과 자비와 희생이라는 보살정신을 통해 인간의 삶을 긍정으로 끌어 올린다. 이를 계승한 원불교 또한 이 욕망하는 삶을 사회적 연기 속에서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이 욕망을 보다 넒은 사회적 가치로 승화시키기를 바라고 있다. 그럼에도 이러한 시각에 한계는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지구 전체를 봤을 때, 이 시스템 전체에 중층적으로 구조화된 욕망을 제대로 분석하고 이에 대처할 수 있는가 하는 점에는 의구심이 있다. 삶을 살리는 상생이나 은혜가 확장된 하나의 개념으로서는 좋지만, 이러한 구조적 욕망을 전복시키고 재구성할 수 있는 철학으로는 부족한 부분이 많다.
 
홍정호: 내가 아는 한 기독교는 욕망을 없애라고 말하는 대신 초월을 지향하는 다른 욕망을 불어넣는 방식으로 욕망의 문제에 맞선다. 인간이 ‘죄인’인 한 욕망의 문제는 자기의 의로움으로써만 극복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이다.
 
전병술: 성리학에서 ‘존천리거인욕(存天理去人欲)’, 즉 선한 본성을 보존하고 사적 욕망을 버리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삶의 태도라고 여긴다. 세속적 욕망과 다른 차원의 욕망을 불어 넣어준다고 했는데, 성리학적 사유에서 볼 때 다른 차원의 욕망이라는 단어 보다는 천리, 종교적 단어로 치환한다면 내 안의 영성을 발현한다는 표현이 나은 것 같다. 한편 공자는 남을 위한 공부와 나를 위한 공부를 구분하고, 남에게 보여주는 공부가 아닌 나를 위한 공부가 옳은 길이라고 하였다. 영성이 내면적인 것이라면, 당연히 내 안에서 나와야 한다.
 
욕망의 다른 차원
 
이관표: 저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욕망이라고 하면 무언가 가지려고만 하는 것 같지만 삶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본능을 넘어서서 무언가 가지려고 하는 욕망의 차원이라면 그 반대편에스는 스스로를 사라지게 하는 또 다른 본능, 즉 프로이트가 말련에 언급했던 타나토스라는 욕망도 공존한다. 두 가지의 욕망이 우리 안에 공존하면서 종교는 타나토스를 따르는데, 예를 들어 삶이 너무 욕망을 가지고 살려고만 하니까, 종교는 여기에 맞서서 스스로 살려는 욕망을 없애고 죽음으로 가자고 이야기 하는 또 다른 삶의 측면인 것으로 해석하고 싶다.
 
사실 저는 예수가 가지고 있는 케노시스 개념과 신적 폭력이 연관된다고 본다. 모든 폭력의 시스템을 끊어 버리는 방식으로 예수가 수행했던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 즉, 스스로 희생양으로 내주는 것이다. 또한 불교 역시 출가한다는 것이 자신을 세속인들을 위해 죽이는 것이라고 들었다. 부처가 상한 돼지고기를 먹고 죽음을 맞이한 것이나, 달마대사가 독 때문에 죽은 것 모두 세속인들이 전해준 공양을 자신의 것으로 기꺼이 받아들이는 일종의 희생양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죽음을 통해서 세속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짊어지고 희생 한 것이다. 종교라는 것이란 결국 스스로를 죽으려고 하는 또 다른 본능의 발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종교 간 평화를 이야기하려면 그 부분까지 가야 하지 않나 한다.
 
물론 지라르도 한계가 있다. 그는 유일신교 이외의 종교가 다신교적이고, 폭력적이라고 이야기한다. 다신교 안에서 나타나는 희생양의 폭력이 결국 사탄이라고 명명된다. 이런 부분들이 종교간 대화에서는 한계가 된다.
 
ⓒ이찬수
공적 욕망과 폭력성
 
전병술: 공동체의 질서와 조화를 위하여 가급적 사적인 것을 배제하고 공적 영역의 확대가 바람직하다는 것이 일반적 견해다. 하지만 ‘공(公)’이라는 단어가 지난 다양한 함의에 대하여 숙고하여야 한다.
 
이찬수: 김태창 교수가 아시아권에서 공공철학을 유행시킨 학자인데 그 핵심은 ‘활사개공’(活私開公)이라고 할 수 있다. 사적 영역을 살리면서 공적 영역을 열어준다는 의미의 공공성을 주로 이야기한다.
 
정주진: 공적인 영역이 강조되면 오히려 구조적 폭력이 강화될 수 있는 가능성도 있다. 특별히 집단성이 강조되는 한국문화에서는 공적 영역의 강조가 다수 또는 전체의 이익의 강조로 왜곡될 여지가 많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사적 이익이나 필요의 충족을 막는 결과를 만든다. 많은 사회갈등이 사실은 공적 영역에서의 이익, 다시 말해 공공의 이익을 위해 사적 이익을 희생해야 한다는 논리를 깔고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원익선: 정의(正義)라는 말도 가변적이고 상대적이다. 법률가도 법에서 말하는 정의를 앞세워 판단을 하지만, 그 한계에 봉착해 있다. 이 문제는 인간 인식의 한계이기도 하다. 불완전한 인간이 인간의 행위를 판단하지만, 그 모든 정황을 전지전능하게 판단할 수 없다. 또한 현실적으로 법은 있는 자의 편이지 없는 자의 편은 아니라고 한다. 있는 자들은 얼마든지 로펌이나 실적 많은 변호사를 구해서 쓸 수 있다. 하지만 없는 자들은 이러한 법률가를 살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래서 가끔 법을 전공하는 학자들이 불교의 법(法=dharma)을 공부하기도 한다.
 
그들은 중국에서 ‘왜 이 다르마라는 용어를 전통적인 법이라는 용어로 번역을 했는가’ 하는 점에 착안한다. 무언가 동아시아 불교의 의도성이 있다. 법은 로우(law)와 다르마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이 다르마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설법이나 깨달음, 경전의 말씀, 진리나 존재 자체도 법이라고 해석한다. 로우는 권력화 된 국가와 연결되어 있다. 이 양자가 결합된 법에서 볼 때, 결국 국가와 종교를 동일선상에서 보고자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국가의 질서를 종교가 승인했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절을 말하는 사(寺)라는 말은 궁중에 있던 모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절은 궁중의 종교적 모임에서부터 출발했다고 할 수 있다. 로우가 가지고 있는 불완전성을 채우고 활용하기 위한 의도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폭력을 정당화하는 국가에서 다르마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어떻게 할 수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동양에서는 서구 역사에서 성립된 정교분리라는 개념이 없다. 오히려 원불교가 말하는 정교동심(政敎同心)의 전통이 하나의 역사적 흐름이었다. 그러므로 다르마가 중국에서 법이라는 용어로 번역된 상황에서 폭력과 평화를 두 대척점의 관점에서 어떻게 바라보고 해결해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다르마와 법
 
이찬수: 의미 있는 얘기다. ‘다르마’라는 언어가 한자 문화권에서 ‘법’으로 번역이 되었다. 법이라는 글자는 가르침과 사회규범이라는 뜻을 모두 지닌다. 역설적으로 폭력을 정당화시키는 규범도 가능하지만 그것을 정복시키는 힘으로서의 법도 가능하다는 말이다.
 
이관표: 법이 다르마로 번역된 과정도 필연적인 것 같다. 종교와 국가 조직이 구분되어 인식된지가 얼마 되지 않았다. 종교적 경험을 통해서 권력을 가지고 국가 시스템을 만들어 왔고 결국 종교와 국가는 나눌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안에서 종교가 가지고 있는 참다운 모습은 망각되고 만다. 예를 들어, 기독교는 천년 이상의 역사를 거치면서 예수가 가르쳐 왔던 모습보다는 종교로서의 종교적인 것들만 추구 되었다. 결국에는 종교개혁도 일어나고 갈등 관계가 일어났다. 사실상 종교와 국가란 어떤 목적을 가져야 하는가 잘 생각해보아야 한다. 종교와 국가가 진정으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면, 그 둘은 사라져야 한다. 왜냐하면 그 둘은 삶의 문제와 위협 때문에 나타난 것들이기 때문이다. 종교와 국가가 제대로 기능한다면, 삶의 문제와 위협은 없어지게 될 것이며, 그런 한에서 그 둘의 궁극적 목적은 그 스스로가 소멸되는 것이다. 국가와 종교가 존속하는 것, 그리고 존속하려고 폭력을 사용하는 것은 가장 자신답지 못한 모습으로 남는 것이다.
 
원익선: 불교적 입장에서 보면 욕망의 주체도 없고 객체도 없다. 돈은 소유의 욕망에서, 승용차나 기차, 비행기는 빨리 달리고 싶은 욕망에서 나왔으며, 옷은 기능적인 측면에서 자신을 포장하는 욕망으로 발전하고 있다. 모든 조작된 사물들은 개인의 욕망이 구체화 된 것으로 본다. 궁극적으로 욕망을 실체화하고 자신과 동일화 할 수는 없다. 욕망의 주체나 객체는 분별심이 만들어내고, 허상의 ‘내’가 또한 집착하는 것에 의해 더욱 공고해진 것이다.
 
전병술: 명대 유학자 왕양명은 우리 눈에 금싸라기가 들어와도 아프다고 하였다. 선함의 지나친 강조나 추구 또한 집착이라는 의미다. 구름이 가끔 태양을 가린다. 태양은 선한 우리의 본성의 비유고 구름은 욕망의 비유다. 구름은 밀어내면 다시 나타나고 밀어내도 또 나타난다. 욕망도 이와 같다. 한 가지 욕망을 제거하면 다른 욕망이 또다시 나를 덮친다. 태양이 비추면 구름은 결국 저절로 사라진다. 욕망을 제거하려고 집착하지 말고 차라리 내 마음의 밝은 면을 찾아내어 비추라 한다. 내 마음의 태양을 비추면 욕망은 저절로 사라진다.
 
욕망은 부정적이기만 한가
 
정주진: 욕망을 없애려고 하는 것은 욕망을 부정적으로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욕망이 과연 모두 부정적인지는 의문이다. 앞에서 모방의 욕망과 희생양 시스템을 이야기 했는데 희생양 시스템은 곧 구조적 폭력으로 연결된다. 결국 욕망은 부정적이고 때문에 없애야 한다는 논리 위에서 희생양 시스템 또한 언급되고 승인되는 것이다. 바로 구조적 폭력이 작동되는 것이다.
 
종교집단에서 희생양 시스템이 작동하곤 하는데 그 이유는 욕망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정하지 않거나, 또는 개인의 욕망을 억제시키고 집단의 욕망을 추구하려고 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예를 들어 특정한 종교집단에서 어떤 개인이 새로운 것에 대한 욕망이 있어서 그것을 추구하려고 하면 종교집단은 그것이 집단 차원의 욕망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제재한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으면 희생 시스템을 작동시킨다. 그런 욕망이 부정적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집단을 위해 그 개인을 희생시키는 선택을 한다. 결국 집단의 욕망을 위해 개인을 희생시키는 것인데 그것이 정당화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곤 한다.
 
욕망을 단순히 부정적으로만 볼 수도, 긍정적으로만 볼 수도 없다. 과연 욕망의 판단 권리는 누구에게 있을까? 설사 종교라 할지라도 욕망을 판단할 수는 없다. 더욱이 제도화된 종교에는 항상 사람의 판단이 개입돼 있다. 종교, 또는 종교집단이라는 명분으로 개인의 욕망을 제재하거나 억압하는 것 자체가 폭력이고, 또는 그런 제재와 억압 때문에 폭력적 충돌이 발생하기도 한다. 오히려 개인들의 욕망을 수용하고 공유해 공동의 것을 만드는 과정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종교는 오히려 그런 욕망을 없애거나 배제하거나 억압하기 위해 희생양 시스템을 작동시키는 경우가 더 많다.  
 
이관표: 지라르는 희생양 시스템이 벌어지는 현장을 항상 축제, 황홀경으로 이야기 하고 있으며, 정주진 박사님이 말씀 하신 것처럼 욕망의 시스템은 개인의 차원의 문제를 넘어 공동체에서 나타나는 것 같다. 2002 월드컵 때의 짜릿함이나 현재 촛불집회에서도 전체로서 함께하고자 하는 합일의 과정들이 있으며, 이것이 사실상 종교적 경험을 대신하고 있다. 전체 집회와 합일의 경험들은 늘 상 정확한 사태를 파악하고 있는지를 성찰해야 할 필요도 가지고 있다.
 
홍정호: 한 방향으로만 호도되는 욕망을 여러 방향으로 호도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관표: 욕망이 추악한 욕망일 수도 있지만 내가 그 욕망을 왜 호도 해야 하는지 정확한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홍정호: 호도한다는 표현이 이 대화의 맥락에는 어울리지 않을 수 있겠다. 그런데, 단 하나의 ‘올바른’ 욕망이라거나 ‘바람직한’ 욕망 따위가 존재한다고 보지 않는다는 뜻에서 ‘호도’라는 낱말을 사용했다. 사태의 본질을 흐리는 것만 호도가 아니라, 사태가 본질로 존재한다는 생각 자체가 호도된 관념이다. 선악의 판단이 힘의 의지의 작용이라는 설명은 충분히 일리가 있다고 본다. 욕망의 문제도 그렇다. ‘올바른’ 욕망이나 ‘바람직한’ 욕망에 대한 주장은 시대를 초월하는 절대기준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그럴 수도 없다. 판단은 어떤 본질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사태에 대한 개별자의 인식, 사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힘의 의지의 산물일 뿐이다. 그러니까 ‘본질적’으로 ‘올바른’ 인식이란 없는 거고, ‘올바른’ 인식을 주장하는 호도된 욕망들의 각축이 있을 뿐이다. 자기의 ‘올바른’ 욕망이 ‘올바르게’ 호도된 욕망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거나, 자각하면서도 외면하려는 태도야말로 철저하게 호도된 관념의 산물이 아닌가? 
 
이관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우리 머리 안에 당연한 듯이 생각하는 인과율, 논리법칙, 인과응보 등이다. 왜냐하면 이 인과응보가 결국 합리적이지 못한 것을 합리화하면서 희생양을 만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황금률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연법칙에 대한 수용이다. 그리고 이 황금률은 결국 인과응보와 원한관계에 대한 합리화를 가능하게 된다. 그런데 그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것은 희생양을 강요하는 것이다. 지라르에 따르면, 희생양은 가장 하층민이고 그들은 당연히 보복을 당해야 하는 이유를 수여받는다. 이방인이다,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언젠가 중심부에 위해를 가할 경계인이다 등등. 결국 황금률이라고 불렀던 우리의 인과응보, 인과율은 희생양을 위한 희생양을 양산시키는 합리화를 이끈다. 유대인의 홀로코스트, 전쟁에서의 민간인 학살 등은 당시에 떠돌았던 그럴듯한 인과응보의 결과였다.
 
우리의 일상적 인과응보의 습관은 하층민들이 원래 하층민이 될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고, 결국 그러면서 계속된 희생을 만들어가는 폭력적인 시스템을 합리화한다. 다시 한 번 밝히지만 모세종교의 유일신론은 다신론적 희생양 폭력에 대한 저항으로부터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홍정호: 합리적이지 못한 걸 합리화하면서 희생양을 만들었다는 말도 맞지만, 합리적인 게 어떤 것이라는 걸 독점적으로 규정하는 방식으로 희생양을 만들어 왔다고 보는 관점도 필요할 것 같다. 이치(理)에 합(合)하는 게 꼭 하나만 있어야 할 필요는 없지 않나?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선악의 판단은 옳고 그름의 투쟁이 아니라, 옳음들 간의 투쟁이고 일리(一理)간의 각축이다. 어떤 판단이 ‘합리적’이라는 데 대한 ‘올바름’ 역시 누가 독점할 수는 없다.
 
종교는 정답이 아니고 질문이다
 
정주진: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나?
 
홍정호: 당연히 가능하다. 종교는 ‘정답’을 말하는 데 목적이 있지 않고, 질문을 갱신하도록 도움을 주는 데 목적이 있다. 타자와의 만남 이전에 내가 갖고 있던 질문들이 하나님, 이웃, 성서와 같은 낯선 타자와 만나는 사건을 통해 다른 차원의 질문으로 바뀌는 경험, 그것이 올바름을 독식한 종교가 내뱉는 ‘정답’보다 더 가치 있고 소중한 종교의 자원이라고 본다.
 
이관표: 종교인의 입장으로 묻고 싶은 것이 있다. 우리가 희생양이 되어야 하는 것이 종교적인 입장일까? 다시 말해, 희생양 시스템이 작동이 됐을 때 과감히 내가 희생양으로 가겠다고 하는 것이 종교인의 입장일 수 있을까? 아니면 희생양시스템을 무화시키고 때려 부수는 것이 종교인들이 취해야 할 행동인가?
 
이찬수: 지라르의 희생양 시스템에서 보면, 희생양은 폭력을 낮추는 역할을 한다. 종교적 차원에서 스스로 희생양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냐 묻는다면, 그럴 필요가 있기는 하지만, 폭력의 일시적 완화 정도로 나타나는 희생양이 아니라, 폭력적 구조를 문제 삼고 폭로하는 희생양의 길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라르도 자발적 희생양을 높이 평가하는 것 같다. 특히 구조적 폭력을 완전히 소멸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예수에게서 보면서, 결국 그 길을 따르라고 요청하는 것 같다.
 
원익선: 대만의 토착 부족 가운데에는 사람을 죽여서 제사 지내는 풍습이 있었다. 그런데 선교 중인 한 목사가 그 부족들의 이 관습을 없애기 위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느 날 빨간 옷을 뒤집어 쓴 사람이 지나갈 것이다. 그 사람을 죽여서 제사를 지내라”라고 했다. 부족들이 그 말대로 제사를 위해 지나가는 그 사람을 죽였다. 그런데 그 빨간 옷을 벗기고 보니 그 목사였다. 그는 희생양이 된 것이다. 그 후 그 존경하는 목사를 기리기 위해 희생제의를 영구히 철폐했다고 한다. 이런 경우는 자기희생을 통해 폭력을 제거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정주진: 희생양 때문에 폭력적 풍습이 중단됐다는 것을 합리화하는 것은 위험하다. 희생이 있었다는 자체가 폭력이라는 점을 부인해선 안 된다. 또한 말씀하신 이야기의 경우에는 사람들이 깨닫고 수용해서 실천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은 것 자체로 구조적 폭력이 없어지지 않고 그 의미를 깨닫고 실천해야 구조적 폭력을 없앨 수 있는 것과 같다. 예를 들어 현 시국의 문제와 관련해 사람들이 우리사회의 부패가 워낙 심하니까 ‘또 다른 부패가 있었구나’라고만 생각했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이 ‘그런 구조를 이제는 무너뜨려야한다’라는 생각으로 모였기 때문에 비로소 구조적 폭력이 조금이라도 와해되고 전체가 무너질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결국은 행동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어야 구조적 폭력을 조금씩 줄일 수 있는 것이다.
 
이찬수: 그렇다. 현재 촛불집회에서 보이듯이, 저마다 자기의 삶에서 희생양이 되겠다는 작은 움직임들이 숨겨져 있던 폭력을 폭로하는 과정을 만든다고 생각 한다. 자발적 희생양의 길에서 하려는 것은 결국 구조적 폭력의 완화이고, 그런 차원에서는 단순히 개인의 희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실천들이 모여 그렇게 만들어 가는 것이다. 자발적인 참가자들로 인해 만들어진 광화문 촛불집회는 아주 희망적이다. 또한 촛불집회가 비폭력적으로 진행되는 것도 우리 사회의 모순을 더 많은 사람들이 읽고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되어 희망적이다.
 
이관표: 전체의 시스템을 깨는 것이 과연 종교적인 사명일까? 아니면 각자가 자기의 삶에서 희생양의 되는 것이 종교적 행위일까?
 
예를 들어, 지라르가 이야기 한 것처럼, 전체가 축제 안에서 희생양 시스템이 되었지만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라. 오른 뺨을 때리면 왼 뺨을 내밀어라. 겉옷을 달라고 하면 속옷을 주라라고 이야기한다. 이것은 단순히 용서하는 차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상대를 사랑함으로써 그들이 자신의 잘못을 깨달음과 동시에 어떤 폭력적 원한관계를 종식시키려는 의도를 지닌다. 저 사람이 잘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내가 희생당함을 통해 알려주고 원한과 복수의 시스템을 개별적인 차원에서 밝혀내고 있는 것이다. 각자의 개인적인차원에서 자발적인 희생양이 됨으로써 전체 시스템의 전복으로 나아가는 것 같다. 이것은 어떤 정치적인 단체행동이 아니라 철저히 내적이고 실존적인 차원에서의 행위이다.
 
촛불집회와 시민혁명
 
정주진: 저는 생각이 조금 다르다. 예수의 희생을 폭력에 대한 저항과 관련지어 생각해보면 그것은 비폭력저항의 마지막 단계다. 구조적 폭력이 너무 크고 모든 수단을 동원했는데 효과가 없어 최후의 수단이 필요할 때 자기희생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폭력에 대항할 때 중요한 한 가지는 스스로 폭력에 희생되지 않는 것이다. 자기가 폭력의 가해자가 되지 않는 것만큼 폭력의 희생자가 되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사실 사람들이 폭력에 저항하는 결심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폭력의 희생자가 되는 것을 강하게 거부하기 때문이다. 저는 학생들에게 폭력을 가하지도 않아야 하지만 폭력에 희생이 되지 않도록 늘 깨어 있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폭력을 중단시키기 위한 희생을 낭만적으로 보거나 미화하는 것은 위험하고 폭력에 대한 저항 수준과 과정 속에서 절대적 불가피성 여부가 치열하게 논의돼야 한다. 
 
원익선: 촛불집회는 시민혁명으로 발전해야 한다. 태풍이 몰아쳐 바다 밑바닥이 위로 드러나고, 이를 통해 바닷물 속의 생물들이 새로운 공기를 맞보고 새롭게 살아나는 것처럼 거시적 차원에서는 혁명을 통해 누적된 불의를 제거하고, 불의의 기득권으로 고착화된 사회를 개혁할 필요가 있다.
 
1963년 베트남에서 전쟁반대와 불교탄압에 대항하기 위해 틱광둑 스님이 분신을 했다. 몇 년 전 참가했던 호치민의 불교 심포지움에서 한 참가자가 그 스님의 제자들에게 이 문제에 대해 물었다. “불교의 불살생 계율은 첫 번째 계율인데, 이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자살이 아닌가”라고. 자살은 불교에서 심각한 계율위배에 해당한다. 제자들 중의 한 사람이 “상대방을 악하다고 죽일 수 있는가. 그것은 살인이다. 따라서 내가 죽음으로써 상대방의 잘못을 깨우친다면 이것이야말로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보살의 희생정신이 드러난 것이 아닌가”라고 답변했다. 
 
그때, ‘인류의 불행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희생양이 필요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희생은 종교인들의 덕목이자 종교집단의 윤리이기도 하다. 한발 더 나아가 종교 스스로가 지향하는 희생정신을 고취하는 내부적 시스템이 필요하고, 현실 속에서 종교는 자신을 소멸의 위치에까지 이르게 하는 희생적 치원의 활동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관표: 종교를 다윈적인 혹은 니체적인 의미에서 말해본다면, 그것은 생명계 전체가 내보내는 생명유지 시스템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다시 말해, 종교란 전체가 스스로를 생존하게 만들려는 어떤 원리이다. 너무나도 살려고만 하는 생의 의지에 균형을 맞추려는 죽음의 의지이다. 스스로를 희생하여 균형을 맞추라는 것이다. 살려는 의지와 희생의 의지가 균형을 맞추어야 생명은 존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있으면서 균형을 맞추는 하나의 죽음의 의지를 종교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정주진: 기독교에서 평신도들은 지속적이고 주입식으로 ‘희생해야 한다’고 배운다. ‘너를 희생하고 봉사하라’는 얘기를 반복적으로 듣는다. 간극이 많이 느껴진다.
 
이찬수: 다음 시간에는 고모리 요이치의 ‘인종차별주의’를 읽고 왜 사람이 사람을 차별하게 되는가에 관련 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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