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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의 감수성이 참으로 길러지는 곳 : <입법과 신생아살해> (3)

기사승인 2017.02.20  13:2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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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시대와 페스탈로치>(6)

시작하는 말

지난 호에 이어서 이번에 마지막으로 페스탈로치「입법과 신생아 살해」의 세 번째 성찰이다. 지금까지 페스탈로치는 섬세한 시적 감수성으로 어떻게 당시 신생아 살해라는 끔찍한 범죄가 발생하게 되었는가를 살폈다. 거기서 그는 신생아 살해라는 시대적 범죄의 진정한 범인은 단순히 그 일을 최종적으로 범한 한 여성이 아니라 그 일이 있기까지의 여러 정치사회적 여건과 관건 속에서 그녀를 그 살해 행위에로 몰고 간 또 다른 행위자들이 있었음을 분명히 밝혔다. 거기에는 그녀를 임신시키고 도망간 남성, 그 당시 특히 여성들에게 혹독하게 적용되던 풍기법과 인정 없는 판사들, 그녀를 더욱 더 큰 절망과 소외로 내몬 가족과 교회의 성직자들, 출산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녀를 외면한 이웃들 등, 그녀의 단독 살해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은 그녀를 위한 ‘정당방위’였을 수 있다는 지적까지 한다.

이러한 시대를 뒤흔들고 뛰어넘는 주창 이후에 페스탈로치는 마지막으로 그러한 신생아 살해라는 반인륜적인 범죄를 방지하기 위해서 당시의 사회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깊이 있게 성찰한다. 여기서 그의 인간과 사회, 性(sexuality)과 노동, 가정과 하느님 신앙, 입법과 정치, 산업과 교육 등, 참으로 포괄적이고 통합적인 그의 세계 이해가 드러난다. 그는 그러한 모든 요소들을 그물망처럼 엮어서 어떻게 인간 삶의 참된 행복과 정의로운 사회 공동체가 이루어질 수 있을까를 깊이 고민하면서 당시 프랑스 대혁명 전 고통 속에 빠져있던 민중들의 삶을 구원하고자 했다. 그의 이러한 통찰들은 동서고금을 넘어서 매우 보편적이고 포괄적으로 적용될 수 있지만 특히 오늘 한국적 정황에서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그가 지적한 대로 당시 프랑스 왕정과 그 주변의 사람들처럼 최고 권력층과 상류층의 부패와 불의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거기서 법의 타락이 참으로 관건이고, 그래서 그것을 바로잡으려는 입법을 강조한 페스탈로치처럼 요즈음 우리나라에서의 특검의 활동과 앞으로 치러진 대선에 더욱 시선이 쏠린다. 또한 당시도 이미 추상적인 이론교육과 주지주의 교육으로 전락한 학교교육과 오늘 한국에서의 무너지는 교실, 제4차 산업혁명을 앞두고 있는 인류 사회에서의 몸의 노동과 마음의 관계, 일반 민중들의 성생활과 결혼, 가족과 육아 등에 관한 그의 혜안들이 오늘 한국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가운데서 그가 시대를 구원할 대안으로 제시한 다섯 가지의 구체적 안건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신생아 살해의 범죄에 근원적인 제동을 걸기 위해 입법자가 통찰해야 하는 것

1) 하느님 신앙, 이웃사랑, 그리고 가정의 평안한 복

페스탈로치는 확신하며 말하기를 국가가 신생아 살해의 범죄에 확실하게 제동을 걸기 위해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 그리고 가정의 평안한 복을 확실하게 보장해야 한다. 그에 의하면 이 범죄의 원인들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부재, 그리고 가정적 덕목과 평안의 붕괴이다. 따라서 입법자는 나라의 사람들이 이러한 덕목들을 보편적으로 갖출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 그에 따르면 이러한 덕목들이 마련되어 있는 사람들에게는 비록 삶의 어려움이 다가와도 그것들이 결코 그들을 불행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또한 그러한 튼튼한 버팀목이 되어주는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가장 자연스럽게 자랄 수 있는 곳이 바로 가정이므로 입법자의 높은 목적은 이 가정의 평안을 보장해 주고 신장시켜 주는 것이어야 한다. 페스탈로치의 가장 기초적인 방책을 말한다.

2) 참된 학교교육의 본질에 관하여

그가 제안하는 다음의 방책은 당시 학교교육에 대한 비판에 나타난다. 이 비판은 오히려 그때보다 오늘날 학교교육이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 되어버린 우리의 현실에서 더 타당해 보인다. 그에 따르면 아이들이 이미 어린 시절부터 잘못된 학교교육으로 불신과 뻔뻔스러움을 배우고 어린 아이들의 순수한 겸손함을 잃어버렸다. 이것은 가정에서 부모에 의해서 길러지는 경건한 순종과 겸손보다도 지적 교육만을 강조하는 학교교육이 무조건 선호되기 때문인데, 페스탈로치는 이렇게 학교교육에 대한 맹신으로 신생아 살해와 같은 범죄의 씨앗이 이미 그때 놓였다고 지적한다.

그에 의하면 가정에서 가정생활의 의무를 배우는 것이 쓰고 읽는 것을 배우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또한 단지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기계적으로 외우면서 자신의 호기심과 탐구력은 죽여 버리는 것보다 오히려 집 아이의 무지가 더 나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살아 있는 호기심을 가지고 자신의 경험으로 배울 수 있으며, 또한 부모는 가정에서 자신의 아이 하나에만 집중할 수 있지만 학교에서는 마을 전체의 아이들을 모두 관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페스탈로치는 학교교육이 부모에 의한 “더 높고, 더 멀리 이끌어지는 (가정)교육”의 밑에 들어가는 한해서만 그것이 인간의 도덕성과 행복을 이끌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KA 9 : 139) 
   
이렇게 당시 학교교육이 일반 민중들의 삶으로 확산되어 들어가는 초기에 이미 그 학교교육을 가정교육 밑에 두었던 페스탈로치의 혜안은 오늘 우리에게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온다. 페스탈로치는 부모의 의무로서 그들 아이들과의 자연스러운 본성의 친밀함을 더욱 고양시키고 곤고히 하는 것을 들었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인간적인 행복의 가장 보편적인 조건이고, 또한 모든 비행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방책이 된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나라의 입법자는 부모를 나라 아이들의 첫 번째 스승으로 삼아야 하며, 부모에 대한 아이들의 사랑의 감정(孝)이야말로 수많은 아이들을 그 유혹의 순간에 건져주는 강력한 비책임을 알아야 한다고 주창한다. 페스탈로치는 여기서 “성스러운 안방”에 대해서 말하고, “자연의 의무감정”을 지적하며, 마치 동아시아 유교의 한 스승처럼 부모에 대한 의무와 가정에 대한 의무야말로 어떤 직업적인 의무나 통치자에 대한 의무보다도 우선함을 밝힌다. 이 부모에 대한 자연스러운 사랑의 감정이야말로 신생아 살해와 같은 범죄에 대한 진정한 방지책이 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페스탈로치 (출처 :위키백과)

3) 인간의 성적 욕망과 그것의 너무 조숙한 성숙 원인에 대하여

페스탈로치는 신생아 살해의 범죄를 방지하기 위해서 입법자가 관심해야 하는 다음의 것으로 인간의 성적 욕망과 그것과의 건강한 관계를 논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에게서 이 성적 욕망이 천천히 전개되도록 하는 것이 또한 입법자가 관심해야 하는 일이다. 그리하여 예를 들어 농촌에서 자신의 이마의 땀으로 빵을 버는 청소년들은 도시의 청소년들보다 덜 위험하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노동으로 피곤해진 몸으로 잠자리에 들기 때문이다. 페스탈로치는 인간의 성적 욕망과 남녀가 같이 잠자리를 하고 싶어 하는 것을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으로 본다. 그리하여 국가가 과도한 법으로 그들을 컨트롤하거나 억누르는 것에 반대한다. 

그러나 그에 따르면 인간의 성적 능력이 건강한 가정의 반경에서 몸의 노동과 성실한 직업의 훈련과 더불어 성숙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나라의 입법자는 평범한 민중 가정의 직업생활과 노동생활이 잘 보장될 수 있도록 하는데 힘을 기울여야 한다. 가정에서 어릴 적부터 엄마가 젖을 내놓고 동생들을 먹이는 것을 보아온 청소년들은 그렇게 과도하게 여성의 몸에 호기심을 갖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자기 주변의 가까운 사물들과 사람들에 대한 의무와 사랑을 키워온 청소년들은 쉽게 비행 청소년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페스탈로치는 다시 한 번 교육이 아이들로 하여금 허황된 꿈만을 쫓게 하면서 손노동과 농사와 같은 건강한 직업생활을 무시하고 사치와 교만에 빠지게 만드는 것을 경계한다. 청소년들의 성적 욕망을 건강한 몸의 노동을 통해서 조절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4) 당시 도시지역에서 고용살이하는 소년/소녀들에 대한 특별한 배려

페스탈로치는 당시 산업화의 물결에 따라 도시로 몰려드는 농촌 출신 청소년들의 미래에  관심 하는 것이 특히 입법자가 할 일이라고 밝힌다. 그는 이들이 도시에 와서 미래에 대한 전망이나 계획이 없이 단지 그 때 그 때의 상황과 쾌락에 좇아 살다가 결혼도 하지 못하고, 배운 기술도 없이, 다시 돌아갈 곳도 없는 상황에 빠지는 것을 보고서 염려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도시에 있는 동안 여러 직업세계를 소개해주며, 미래에 대한 전망을 가지고 준비하게 하고, 그래서 다시 정상적인 가정생활로 돌아갈 수 있는 기반을 안내해줄 선도 조직을 만들기를 권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이들이야말로 바로 신생아 살해와 같은 범죄에 가장 빠지기 쉬운 그룹이 된다고 한다. 따라서 이들에게 미래에의 희망을 주며, 알맞은 직업기술을 습득하게 하고, 건전한 가정생활로 이끌 수 있을까를 연구하는 것이 신생아 살해의 범죄를 방지할 수 있는 자연스럽고 보편적인 방책이 된다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페스탈로치는 이들 젊은이들이 자연적으로 가지고 있는 자신에 대한 긍지와 진취성, 자유에 대한 갈망 등을 그들 선도를 위한 방법과 연결시킨다. 그는 이러한 감정들이 상처받지 않고 건강한 자긍심과 수오지심, 악에 대한 혐오 등으로 자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청소년들의 특징인 진취성과 용기, 자긍심은 그들 나이에 자칫 과도한 행동을 불러올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심하게 벌주어서 그 건전한 싹까지도 잘라버리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라고 지적한다. 그렇게 자신에 대한 자존감의 싹을 자르는 것이야말로 미래의 비행과 범죄 가능성을 심어주는 가장 확실한 길이고(KA 9 : 149), 그것은 그래서 가장 위험한 일이다. 그러므로 청소년들을 다룰 때에는 항상 이 점을 배려해야 하고, 그들의 감정을 부모와 같은 마음으로 소중히 다루고 그들의 자부심을 결정적으로 꺾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페스탈로치는 사회의 낮은 계층의 자존감과 그들이 그것을 지킬 수 있도록 기본적인 생활을 보장하는 것이야말로 입법자가 신생아 살해와 같은 범죄를 예방하는데 취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방법 중의 하나임을 강조한다. 사회의 낮은 계층이 인간적인 자존심과 긍지를 잃지 않고 자신의 선함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게 해주는 것, 주변으로부터 ‘인간에 대한 예의’를 받음으로써 절망하지 않고 자신 속의 선한 의지를 점점 더 고양시켜나가도록 하는 것, 이것이 입법자의 중요한 관심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 학교의 청소년들이 학교에서 과도한 경쟁주의적 평가방식으로 일찍부터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특히 지독한 대학 입시경쟁에서 일찌감치 자신을 포기하여 온갖 유혹과 퇴폐에 빠져 지내는 것을 볼 때 이러한 페스탈로치의 통찰은 의미로 다가온다. 청소년들의 자존감 포기야말로 시한폭탄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5) 부와 족벌체제, 국가적 낭비와 재정개혁에 관하여

페스탈로치는 이미 앞서서 상층민의 윤리적 건전성이야말로 신생아 살해와 같은 사회적 범죄를 방지할 수 있는 출발점이 된다고 밝혔다. 당시 상류귀족들의 사치와 군인들, 그리고 도시민들의 방탕과 탈선이 나라 전체에로 퍼지고, 이와 더불어 지식층 사람들의 교만과 과도한 주지주의적 풍토는 건전한 손노동과 직업세계를 무시한다고 지적하였다. 그리하여 국민 전체가 모두 식자층만을 지향하여 시민의 아들들은 뚜렷한 직업의 훈련도 없이 게으르고, 교만하고, 불만으로 가득한 군상들로 변하여 이들에 의한 윤리적 타락이 지대하다는 것이다. 
   
페스탈로치가 이 글을 쓸 당시는 아직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하기 전이었다. 그래서 그는 당시 부패한 왕정과 귀족 족벌체제를 비판하며 개혁을 부르짖었지만 그것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혁명 자체를 생각하지는 않은 시점이다. 당시 궁정의 사치로 국가 재정이 고갈되고, 귀족들은 온갖 협잡으로 이익을 독점하며 부를 세습하고, 자신의 땀과 노력 대신에 횡재와 은혜로 돈을 차지하는 사람들이 많아짐으로써 나라의 부패는 극심해졌다는 판단이다. 이런 곳에서는 건전한 중산층이 형성될 수 없고, 가정의 행복도 보장되지 않으며, 그래서 사람들은 불의하게 갑자기 얻어진 부를 가지고 사치와 허영, 방탕에 빠진다는 것이다. 페스탈로치는 이렇게 왕을 포함한 궁정그룹과 상류계층이 내적으로 타락하고, 국가 재정은 말이 아니게 되었을 때 그들의 정신은 참다운 입법자와 정치가의 마음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결코 민중들의 필요물들이 무엇인지를 알 수가 없고, 따라서 그것들을 채워줄 수가 없다고 밝힌다. 

이렇게 해서 국가재정의 무질서는 각 가정의 무질서로 이어지고, 나라 안에는 온갖 폭력이 난무하며, 사형제도와 노예선, 노역마차, 고아원, 과부기금과 범죄자를 다스리는 칼, 전당포, 복권판매소, 빈민수용소 등이 세워지지만 진정으로 국민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비판한다. 프랑스 대혁명 전의 유럽 구왕정 사회의 부패상을 낱낱이 밝힌 것이다.

페스탈로치는 글의 마지막에 가면 갈수록 진정으로 참다운 입법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입법자 구원자를 자주 희구한다. 신생아 살해와 같은 범죄에 있어서 사형제도가 결코 국가가 생각하는 만큼 효과 있지 못하다고 밝히는 그는 오히려 인간성만 더 피폐하게 만드는 그와 같은 제도의 폐지를 주창한다. 대신에 국가의 공공성을 위해서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 참다운 지도자, 입법자 계급의 헌신과 희생을 촉구한다. 하느님에 대한 경외와 정의, 겸손과 인간성, 그리고 자비와 도덕성에 입각해서 입법의 정신이 세워질 때, 그래서 나라 안의 각 사람들이 평화롭게 가정의 복락을 조용히 누릴 수 있게 될 때, 이것이야말로 가장 유일한 예방책이 된다는 것이 그의 마지막 언어이다. 이 일은 그러나 다시 결코 나라의 지도자 계층, 그들의 손에서 법이 만들어지고 집행되는 입법자 계층의 내적인 고양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 그의 통찰이다(KA 9 : 181). 한국 국회의원들의 자질과 자격이 참으로 염려되는 이유이다.    

마무리하는 말: 우리 시대와 페스탈로치

지금까지 세 번에 걸쳐서 페스탈로치의 「신생아 살해와 입법」을 살펴보았다. 우리 시대보다 200여 년 전의 일이었지만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많고, 그의 시대를 앞서는 생각들에 깊은 감동을 받는다. 오늘 우리 시대에도 인간으로서 도저히 생각할 수도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자신의 딸 같은 여성들을 가두고서 매춘을 강요하는 사람들, 10대에 임신하여 태어난 아기를 학교나 지하철역 화장실에 버리는 아이들, 초등학생들까지도 성적 욕망의 대상이 되어서 희생당하는 이야기, 학교 공부라고는 하지만 아무런 흥미도 갖지 못하고 주변으로부터 무시와 왕따를 당하고서 게임과 술, 마약, 성적 향락에 젖어 가는 이른 나이의 청소년들, 그런 아이들을 조금의 돈으로 사서 무자비하게 착취하는 어른들과 부동산 투자나 주식, 로또 등으로 단기간에 천금을 얻는 일이 다반사가 되어 나라 안의 사람들이 온통 투기꾼으로 변해 가는 이야기, 그래서 가정의 평안은 점점 더 뒤편으로 밀려나고, 입법과 공공의 일을 하는 사람들의 관심은 철저히 사적 이익으로 채워져서 정치가 신물이 나고, 여기서 힘없는 사람들은 점점 더 어느 한 군데 호소할 데가 없어지는 상황 등, 우리도 이번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겪으면서 더욱 더 적나라하게 마주하는 이야기들이다.
 
페스탈로치는 우리의 이러한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던 당시의 유럽 상황에 맞서서 단지 최종 범죄행위자의 사형이나 공개처벌 등으로는 그 형편이 결코 나아질 수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가장 포괄적이고 보편적인 방법을 찾고자 노력했고, 여기서 그는 공공을 위해서 자신을 온전히 희생하는 입법자 구원자를 희구했다. 오늘 우리시대에도 어떻게 하면 구원의 서광이 비추어질 수 있을까?

종교는 성행하지만 하늘에 대한 참다운 두려움은 적어서 오히려 그 신앙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선언하는 종교인들만이 난무하다. 그런 상황에서 페스탈로치가 가장 희망을 걸었던 공공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 천하에 두려울 것이 없어서 모든 법과 규칙을 자신의 사적인 이익을 위해서 사용한다. 그래서 사회에는 점점 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많아져서 이들이 마지막으로 취할 수밖에 없는 방법으로 죄를 짓고, 그러나 여기에 대해 더 큰칼과 징벌로만 다스린다면 누가 있어 우리를 여기서 벗어나게 할 것인가? 오늘날 위정자들 가운데 누가 있어 페스탈로치가 신생아 살해자들의 상황을 성찰하면서 보여주었던 섬세한 배려를 할 것이며, 그래서 그 범죄가 단지 당사자만의 비행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저지른 것이라는 사실을 뼈아프게 인정할 것인가?

오늘 우리 시대는 페스탈로치 시대보다도 훨씬 더 과격하게 가정이 흔들리고 있다. 비록 가정의 형태와 가족적 삶의 양식은 달라질 수 있다 해도 인간은 여전히 가까운 삶의 반경과 그 속에서의 작고 친밀한 관계망 속에서만 삶의 지혜를 배우고 더불어 살 수 있는 덕목들을 배울 수 있는데, 오늘날 누가 있어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그 가정을 지켜내는 일에 헌신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의 학교교육도 페스탈로치가 지적한 대로 삶에서 가장 절실한 일과 자기 주변의 일은 제대로 처리할 줄 모르면서 먼 곳으로만 시선을 돌리게 하고, 머리만 커져서 몸의 노동을 싫어하게 만든다. 자신에 대한 긍지와 존중감보다는 항상 비교 속에서 열등한 것만이 지적되어 아이들의 자연스런 선함은 심하게 훼손되어 간다. 이런 경우 이 아이들은 시한폭탄과 같이 언제 자신들을 폭력적으로 내던질지 모르고, 그래서 잠재적인 비행자가 되어서 거리를 방황하고 있다. 

여기서 사회 지도층의 사치와 독점, 교만함, 이기주의, 인색함은 그대로 사회 전체의 모럴과 문화가 되고, 공공적인 것에 대한 존중이나 타인에 대한 배려가 점점 사라져서 나라는 맨 위부터 아래에까지 사적 욕망의 전쟁터가 되었다. 이러한 모든 악순환의 고리를 전체적으로 통찰하고, 그것을 끊고 다시 공공의 기반을 회복하기 위해 희생하는 입법자, 오늘 한국 사회도 이러한 입법자를 절실히 요구한다. 페스탈로치가 말한 대로 드러난 한 두 명의 범인을 처벌하는 것으로는 결코 문제를 풀 수 없다. 단순히 박근혜/최순실 정국만 지나가면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 국민들 전체의 인간성을 고양시키는 것, 그래서 그 일이 모든 입법과 입법자의 궁극적인 목적이 되어야 한다. 종교와 정치와 교육은 그런 의미에서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고, 그래서 우리의 통찰과 인내는 더욱 깊어져야 함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은선 (세종대)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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