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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내 소유라! (출 19:1~6)

기사승인 2017.02.20  13: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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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2월 19일 주현절 일곱째 주일 설교

*영상 설교 https://youtu.be/kdgAtYSk8GQ

1. 독수리 날개로

1) 시내광야까지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제 최종 목적지인 가나안 땅을 향하여 나아가게 되었다. 죽음과 죄로부터 탈출했다고 해서 곧바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그 중간에 길고 험난한 과정이 있다. 징그럽게 속 썩이던 자식이 자신의 잘못을 눈물로 뉘우치고 회개했다고 해서 당장 모든 것이 변하지는 않는다. 말투, 태도, 생활 습관, 새로운 삶의 목표 등을 찾기 위해 또 다른 긴 여정을 거쳐야 한다. 이것이 인생이고 신앙생활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당장 새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과정을 거쳐서 천국의 문에 이르는 것이다. 성화의 과정이 필수적이다. 오늘 우리의 삶은 궁극적인 구원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광야다. 

구원은 이집트를 탈출했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광야의 삶에서 어떻게 변화되고 성숙되고 더욱 든든한 신앙을 유지하느냐에 따라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의 구원에 이를 수 있느냐가 결정되는 것이다. 이것을 결정하는 과정이 광야이며, 이스라엘은 오늘 시내광야에 이르게 되었다. 여기서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역사적인 계약을 맺게 된다. 십계명을 주시는 그 계약을 맺기 전에 하나님은 모세를 불러 이스라엘에게 하나님 말씀을 전하라고 하신다.

2) 독수리 날개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4절) 

독수리는 하늘의 제왕이다. 높은 절벽꼭대기에 살며 양이나 염소 등 큰 짐승도 사냥한다. 웬만한 비바람에는 미동도 하지 않으며, 큰 날개를 펼치고 하늘을 나는 모습은 위풍당당하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탈출하고 광야의 험난한 과정을 헤쳐 나가는 위험한 상황 속에서 이스라엘을 보호하고 안전하게 인도해주셔서 오늘 시내 광야까지 이르렀는데 그것은 마치 폭풍우와 맹수들의 공격으로부터 독수리가 큰 날개로 이스라엘을 안전하게 품어서 여기까지 온 것과 같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환기시키고 있다. 

이스라엘이 노예 생활에서 자유를 얻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택과 은총이지 이스라엘이 그럴만한 자격이 있어서 구원을 획득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택과 은총이다. 신앙생활에서 이 점을 잊어버리거나 약화되면 기독교 신앙은 뒤틀려버린다. 교회는 은혜가 있어야 한다. 은혜로운 교회는 우리 모두 하나님의 은총으로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고백하기에 갈등이나 미움이나 분열이 들어설 자리가 별로 없다. 오늘 여기까지 이르도록 베풀어주신 하나님 은혜에 대한 믿음이 없거나 흐려지면 반드시 거기에는 인간의 교만이 들어차서 교회가 갈등과 분열에 휩싸이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우리는 지금도 하나님의 선택과 인도와 보호하심으로 광야 같은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늘 새롭게 인식하고 고백하는 교회가 날마다 가나안을 향해 한걸음씩 전진하자. 

3) 중요한 것은 독수리 날개로 업어서 인도하여 주셨다는 표현이 멋지게도 보이지만 평탄한 것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주민청년 3명이 참가한 인도 어학 연수 마지막 사막체험 프로그램에서 낙타를 타고 있다 ⓒ이훈삼

40일 동안 인도 이화랑목사님이 진행하는 인도 어학연수 갔다가 어제 도착한 우리 청년들이 일정 마지막으로 북인도 쪽을 여행하면서 사막에 들어가 사막에서 잠도 자고 또 낙타도 타보았다고 한다. 

낙타나 말 타는 것이 새롭고 신기해보여도 사실은 꽤 무섭고 위험하기도 한 것이다. 하나님이 독수리 날개로 업어서 우리를 인도한다고 할 때, 푹신한 침대에 리무진타고 다니듯이 평안하고 풍성한 상황을 기대하면 실망한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니 결과적으로 안전하고 행복한 것이지만, 그 상황을 냉철히 보면 불편하고 위험한 과정이 분명하게 내재해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위험하고 무섭고 불편하지만 주님께서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면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도착하도록 도와주시고 은총을 베풀어주신다는 것을 믿고 그 믿음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2. 너희는 내 소유라

1)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5절)

이 세상 만물은 모두 창조주 하나님의 소유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들은 소유 중의 소유다.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다. 핵심이라는 뜻이다. 오늘 본문에서 ‘소유’라고 번역한 말은 구약성경 다른 곳에서는 보배, 금은보화로 번역되어 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은 우리는 하나님의 보배라고 번역할 수 있겠다. 보물을 간직한 사람은 마음이 늘 거기에 가 있다. 집안에 금은보화를 간직한 사람은 매일 그 보물이 잘 있는지 확인하고 그것을 보면서 든든해하고 흐뭇해할 것이다. 내 돈을 어느 곳에 많이 투자하면 관심과 마음이 늘 그곳에 가 있다. 자식은 우리의 단순한 소유물이 아니고 보배다. 늘 꺼내 보고 싶고 가슴 뿌듯해하고 인생의 기쁨이다. 자녀들은 이러한 부모의 마음을 잘 헤아릴 때 철이 드는 것이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고후 4:7)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하나님이 가장 소중이 여기시는 보배다. 바울도 하나님께서 질그릇 같은 우리 안에 보화를 담아주셨다고 했다. 

2) 하나님은 세상의 수많은 것들 중에서 우리를 가장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보배라고 선언하셨다. 보배는 가장 중요한 자리에 가장 존귀하게 모셔 놓는다. 유명 작가의 도자기나 유명 화가의 그림을 창고나 베란다에 그냥 내버려두는 사람은 없다. 

피렌체 세뇨리아 광장의 복제품들 ⓒ이훈삼

피렌체에 가면 아예 진품들은 쾌적한 환경에 경비가 삼엄한 미술관에 잘 보관해놓고 길거리나 광장의 많은 이들이 보고 만지는 곳에는 모조품을 진열하고 있다. 보배는 혹시라도 상할까 변질될까 애지중지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런 보배처럼 여기시고 아끼고 사랑하고 보호하고 돌봐주신다는 것이다. 

3) 하나님의 보배 
신앙생활하면서 생각할수록 신기하고 머리가 숙여지는 것은 2천 년 전 초대교회 교인들의 확신과 목숨 건 신앙이다. 요즘처럼 민주주의와 인권이 어느 정도 확립된 시대에도 기독교 신앙 위에서 정의를 외치다가 직장이나 가족들에게 조금만 위협을 느껴도 고민하고 신앙적 소신 행위를 멈추게 된다. 그런데 2천 년 전, 로마 제국의 살벌한 탄압과 유대 사회 안에서의 소외를 겪으면서 두더지처럼 땅속으로 숨어들어간 신앙인들의 신앙고백에 저절로 숙연해진다. 

선한목자, 로마 칼릭투스 카타콤, 250년경 ⓒ이훈삼

카타콤의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벽에다가 그려 놓았다. 기독교 미술의 시작이다. 젊은 목동이 양을 어깨에 메고 있다. 오른 손에는 물주전자를 들고, 양쪽에는 양들이 한 마리씩 따라오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양인 교인들을 어깨에 메어 보호하시고 물도 먹여주시고 든든하게 지켜주실 것이라는 기대와 확신을 표현함으로써 그 엄혹한 세월을 견딜 수 있었다.

이후의 위대한 기독교 미술 걸작들에 비하면 이건 유치원 아이들이 그린 것과 같은 수준이다.대상에 대한 정확한 관찰과 묘사도 없고, 원근법이나 명암 처리도 없다. 세부적인 묘사를 통해 사물을 재현하고 중심인물의 표정과 몸짓을 통해서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하여 보는 이들에게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요소도 희박하다. 그럼에도 이 단순하고 초보적인 프레스코 벽화는 보는 이들에게 깊은 감동과 여운을 남기고 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얼마나 두렵고 얼마나 절망적이었을까! 평생을 땅속에서 살면서, 언제 햇빛을 볼 수 있을지 알지 못하고, 언제 발각되어 끔찍한 사자 밥이 될지 모르는 극단의 불안 속에서도, 우리 선조들은 저런 그림을 그리면서 자신의 신앙을 다시 한번 다잡고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 달려갈 길을 다 간 것이다. 

그 결과 오늘 지구 반대편의 우리들에게도 예수 복음이 전승될 수 있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초대교인들이 끊임없이 흔들리고 재 다짐하면서 고수했던 신앙은 주님은 우리의 목자(보호자, 인도자)라는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독수리 날개로 우리를 업어 인도하신 출애굽의 하나님이다.

3. 제사장 나라 · 거룩한 백성 

1) 유대인들의 오해 : 권위/권력으로!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집트로부터 탈출시켜 꿈의 나라 가나안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은 너희는 나의 보배요 나아가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6절)고 선언하신다. 

개인이나 집단이나 자신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히 중요하다. 선진국으로 도약하려는 나라들이 올림픽이나 월드컵 같은 세계적인 행사를 유치하려고 하는 것은 그런 행사를 치르고 나면 국민들이 커다란 자부심을 갖기 때문이다. 자부심/자존감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매우 중요한 자산이다. 

유대인들이 정말 어려운 역사 속에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하지 않고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이런 자부심이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제사장의 나라가 되게 하시고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셨다는 자부심이 극단적인 고통 가운데서도 좌절하지 않고 끈질기게 지탱하는 중요한 힘이 되었다. 동시에 한편으로 유대인들은 사실 하나님의 이 말씀을 심각하게 오해했다. 자부심이 지나치면 남을 무시하고 자신만 옳고 거룩하다는 교만에 이르기 쉽다. 자부심은 늘 상대적이어서 자기 자신의 자존심으로 끝나지 않고 나 아닌 남을 천하게 여기고 심지어는 차별하고 학대하면서도 당연하다고 여긴다. 

세계교회(WCC)는 지속적으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2016 팔레스타인-이스라엘 펑화 주간 선포 (9.18~24)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의 정통성을 상실했다고 여기는 사마리아인들에 대한 냉대가 그렇고, 20세기부터 세계적 불안요인이 되고 있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공격도 이런 교만함에서 나오는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을 통해서 권력으로부터 끔찍한 핍박을 당한 유대인들이 이후 중동에서는 오히려 나치와 비슷하게 힘으로 약자를 누르고 차별하고 죽이는 짓을 멈추지 않고 있다. 이런 아이러니의 뿌리에는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거룩한 백성이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사람들이기에 이런 고통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그릇된 역사 인식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오늘과 같은 말씀을 잘 이해해야 한다. 

2) 헌신과 사명감

오늘 출애굽 후 시내 광야에서 십계명을 주시기 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신  ‘너희는 제사장의 나라이며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이라는 이 말씀의 뜻은 이스라엘이 다른 나라나 집단보다 월등히 힘을 가지고 지배하고 권력을 휘두를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제사장처럼 온전히 자기 삶의 목적을 하나님께 두는 삶, 하나님께 헌신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모세 이후1300년 동안 이스라엘은 제사장이며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이라는 말씀을 이루기 위해 다윗처럼 무력으로 변방을 지배하고 복속시키는 메시아를 기다렸고 유대인들은 지금도 기다리고 있다. 기독교 유대교와 갈라지는 지점은 바로 여기다.

하나님이 진정 원하시는 제사장의 나라, 거룩한 백성은 힘으로 지배하고 강제로 복속시키는 역할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낮추고 섬기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부활을 향해 나아가는 삶을 사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온 뜻을 다해 정성을 모으고 헌신하는 사람이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인 것이다. 

3)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킨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의 삶과 사회에서도 구원을 성취하신다. 주님은 독수리가 강한 날개를 펴서 폭풍우를 막아내듯이 우리를 그 품에서 보호하시며, 목자같이 우리를 돌봐 주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요 아끼고 사랑하는 보배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사랑을 받은 우리는 이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할 사명자로서 제사장의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비 그리스도인이 하는 것처럼 힘으로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섬기고 사랑하면서 이루는 새로운 나라다. 

주님의 보배답게, 주님처럼 사는 것을 이상으로 삼고 기도하면서 최선을 다하자!

이훈삼 목사 (성남 주민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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