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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생각하는 '낙태'는 없다

기사승인 2017.02.16  16:3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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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소개] '있잖아...나, 낙태했어' (한국여성민우회, 2013)

이런저런 말 대신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입을 다물고, 소녀의 공허한 저녁을 오래도록 바라봐 주는 일이지 않을까 –영화 이슬 후(not a girl, 2006)

지난 해 9월 22일, 보건복지부는 현행 의료법 시행령, 시행규칙에 ‘비도덕적 진료 행위’의 하나로 ‘인공임신중절 시술’을 포함시키겠다고 발표했다. 의사가 이를 시술할시 최대 12개월까지의 자격을 정지할 수 있는 개정안이 입법예고 됐다. 곧바로 산부인과 의료인들을 비롯한 여성, 인권단체의 거센 반발이 이어졌다. 의료인들은 전혀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 법안을 지적하고 나섰고 여성들은 자신의 몸을 통제하려는 정부의 ‘갑 아닌 갑질’에 분노했다. 결국, 낙태율을 떨어뜨린다는 명목으로 무리수를 던졌던 보건복지부의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보건복지부의 얼토당토않은 입법예고는 해프닝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를 계기로 낙태죄 폐지운동에 불이 붙은 것이다. 낙태죄 폐지를 주장하고 나선 여성들은 낙태를 죄로 규정하는 모든 잣대에 이의를 제기했다. 교황이 모든 사제들에게 낙태죄를 사면할 수 있는 권리를 허용했다고? 웃기는 소리. 여성들은 낙태를 둘러싼 프레임, 이를테면 도덕, 생명, 윤리와 같은 틀을 깨고 거리로 나왔다. 그동안 부정당했던 자신의 몸이 아닌 ‘낙태죄가 문제’라며 피켓을 들고 저항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10월 종각에서 열린 '검은 시위' 현장 (사진출처 : 한국여성민우회)

여성의 몸은 공적인 영역이 아니라 지극히 사적인 영역이라는 선포는 모두에게 새로운 자각이었다. 여성의 몸, 여성의 자궁은 항상 타의에 의해 통제되었다. 산아제한정책이 그랬고 낙태죄가 그랬다. 낙태를 권하던 사회는 어느새 낙태하는 여성을 살인자로 몰아갔다. 낙태를 경험한 여성들이 죄책감을 갖는 것은 당연했다. 죄책감에서 벗어나려 하는 여성들의 시도는 ‘낙태충’으로 매도됐다.

낙태죄 폐지운동이 시작되고 기존의 이러한 프레임을 깨려는 여러 가지 움직임들이 있었다. 여성들은 출산과 임신에 대한 결정권을 여성스스로가 갖는다는 의미로 ‘낙태’, ‘임신중절’이 아닌 ‘임신중단’이라는 단어를 채택했다. 또 여성들은 차마 발화되지 못했던 임신중단의 경험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타인이 침범해서도 안 되고 침범할 수 도 없는 자신의 몸에 대한 이야기였다.

여성들이 거리로 나오고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게 되기까지, 스피커 역할을 한 곳은 한국여성민우회다. 한국여성민우회는 1987년 창립된 단체로 우리사회에 여성 이슈가 첨예하게 두드러지기 이전부터 여성운동을 진행해 왔다. 호주제폐지운동, ‘웃어라 명절’캠페인, 회식문화 바꾸기 캠페인, 성폭력특별법제정 활동 등 한국여성민우회가 진행해온 운동, 캠페인의 스펙트럼도 다양하다. 지난해 낙태죄 폐지운동의 일환으로 ‘검은 시위’에 참여하기도 했다. 

낙태죄 폐지운동 이전부터 한국여성민우회는 낙태 관련 실태조사를 진행해 왔다. 그러나 낙태 시술을 받는 여성이 연간 20만 명이라는 통계가 무색하게 그것을 겅험한 여성들의 이야기는 들어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일을 한국여성민우회가 시작했다. 2013년에 출간된 <있잖아...나, 낙태했어> (한국여성민우회) 는 발화되지 못했던 여성들의 임신중단 이야기를 생생하게 담아낸 책이다.  

<있잖아...나, 낙태했어> (한국여성민우회, 2013) ⓒ에큐메니안

임신중단을 경험한 여성들이 담담하게 털어놓은 자신의 이야기를 발화자의 말투 그대로 기록한 <있잖아...나, 낙태했어>는 일종의 증언집이다. 25명의 여성들이 참여했다. 매체에서 표현 됐던 ‘낙태’와는 달리, 책을 통해 발화된 ‘임신 중단’ 이야기는 상상만큼 절망스럽지도, 깊은 수렁에 빠져 허덕이지도 않는, 일상을 살아내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다양한 연령, 다양한 상황에 처해 있는 한 개인, 개인의 이야기다. 

책을 통해 알게 되는 한 가지 사실은 그녀들이 갖는 죄의식의 종류가 생명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죄의식은 상황, 관계에 따라 다양하게 형성된다. 상대 남성의 태도, 산부인과 의료진으로부터 받는 모멸감, 주위 관계에서 당하는 배제, 혐오는 임신중단을 경험한 여성들이 존중받지 못한 ‘인권’의 영역이기도 하다. 섣불리 태아의 인권을 들먹이며 윤리의 잣대를 들이대는 사람들에겐 생각지도 못한 영역이다. 

책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다른 여성들에게 힘이 되고 싶은” 동기로 인터뷰에 참여했다. 그런 점에서 <있잖아...나, 낙태했어>는 임신중단을 경험한 여성들, 또는 그들과 공감하기 원하는 이들을 잇는 연대의 끈이다. 무엇보다 이건 몸의 이야기다. 책을 엮은 한국여성민우회 여성건강팀은 “지독하게 내밀한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숨은그림찾기처럼 분명 공통적으로 겪은 시간과 경험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책에 대해 소개했다.

한국여성민우회는 “공통적으로 겪은 시간과 경험들이 같은 ‘자락’을 가진다”고 전하기도 한다. 그것은 ‘낙태의 불가피성’이다. 이미 사회구조적인 문제와 ‘낙태’는 상호작용하고 있다는 뜻이다. 임신중단을 경험한 여성들의 발화가 통제되고 도덕, 윤리의 영역에 가둬 둘수록 근본적 문제 해결이 어려운 것은 당연하다. ‘생명존중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 주는 것’이 ‘1도’ 도움 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문제 해결은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먼저 경솔하지 않은 태도로 묵묵히 들어주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 물꼬를 한국여성민우회가 텄다. 시작된 이야기는 들어줄 겸손한 귀를 찾고 있다. 한숨과 눈물과 웃음이 교차하는 임신중단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자. 한 해 20만 명이 임신중단을 경험한다면 20만개의 사연과 이야기가 있다.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낙태’는 없다. 

김령은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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