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석헌과 장준하, 그리고 박정희>
자유언론수호연맹, 위원장 함석헌, 부위원장 겸 대변인 장준하
장준하와 함석헌 |
장준하! 우리는 여기서 잠시 숨을 멈추고 장준하라는 세기적(世紀的) 인물을 되새겨 볼 이유가 있다. 장준하라는 인격을 말이다. 「전국 언론인 대회」가, 「언론윤리위원회법 폐기 투쟁위원회」가 그 역사적인 싸움에서 완승을 거두고, 「투위」를 해체, 퇴진을 결의하는 감격의 장(場)을 열게 된다. 박정희와 그 세력, 그 정권이 뭐라 변명을 해도 그 「언론윤리위원회 법」의 전면보류선언(?)은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있는 제도권언론인들에겐 일대 감격이 아닐 수 없었다. 1961년 5.16이후 이렇게 좋은 날, 좋은 일이 없었다. 붓이 칼을 이겼다는 데서 말이다.
박정희의 언론법 전면 보류 발표로 「언론윤리회법 폐기 투쟁위원회」의 자진해체 성명에는 “이번 투쟁이 사실상 유종의 미를 이루게 한 박대통령 영단에 대하여 경의와 감사를 표명하는 바이다”라는 립스틱으로 밖에 이해할 수 없는 표현이 없지도 않으나, 박정희의 그 언론법 보류, 분명히 말한다면 그 폐기는 전국의 언론인들이 정권의 법제에 대한 철저한 비협조, 비협력, 비폭력 저항으로 이루어낸 실로 값진 쟁취였다.
물론 장준하에게는 이 제도권 언론인들이 누리게 된 이때의 기쁨이 마치 외인 같은 것이었다 해도 말이다. 이때의 장준하의 가슴은 조금 후에 말하게 될 것이다. 그 악법저지를 위한 투쟁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결의서>의 채택으로 투위를 해체한다. 위원회 결성 35일 만이었다.
“우리 「언론위원회법 철폐투쟁위원회」에서는 9월 10일로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이에 해체 할 것을 선언한다. 지난 8월 2일 국회에서 「신문윤리위원회법」이 통과된 이래 38일간의 파란을 회고하면 언론자유를 수호하려는 역사적 의식을 가진 이번 투쟁이 이제 사실상 유종의 미를 거두게 한 박대통령의 영단에 대하여 경의와 감사를 표명하는 바이다. 특히 이번 투쟁과정에서 언론인들이 부동의 신념으로 갖은 고난을 무릅쓰고 끝까지 목적 달성에 매진해 온 것은 한국 언론인의 전통을 더욱 빛나게 하였다는 것을 명기하고 전체 언론인들이 총단화(總團和)하여 새로운 태세를 갖출 것을 다짐한다. 이제 우리에게 부과된 자율적 책임이 중차대함을 통감하고, 다시는 이번과 같은 쓰라린 시련이 없기를 기약하면서 전 투쟁과정을 통해 뜨거운 성원을 보내준 국민여러분께 심심한 사의를 드리는 바이다.”
다시 말하지만 언론악법의 철폐를 위한 전국언론인들의, 특히 투쟁위의 일사각오의 그 싸움, 그리고 그 싸움에서의 완벽한 승리에 환호와 고마움의 박수를 보내면서도, 여전히 이어지는 또 한 의(義)의 싸움을 주목해야 한다. 필자가 앞서 말한 바 있는 장준하의 자유언론수호의 싸움이다.
함석헌의 그의 자서전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에서 자기 자신을 ‘실패하기 위해 온 사람’이라고 했다. 세상에 실패하기 위해 온 사람이 어디 있을까? ‘실패하기 위해’ 왔다? 참을 위해 하는 싸움은 전혀 그 결과를 관심하지 않는다. 자신의 죽음 까지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 같은 싸움은 구경하는 자들에겐 더 할 수 없는 천치요, 백치로 보인다. 함석헌이 “나는 실패하기 위해 온 사람”이라 했을 때, 그것은 현실적으로 패배 할 수밖에 없는 싸움을 싸우러 온 자임을 뜻한다. 구경하는 이들에겐 그건 더 할 수 없는 등신(等神)일 수밖에 없을 터, 그래서 함석헌은 자신을 실패자라 했지만, 그러나 자신을 실패자라 선언하는 그 ‘실패자의 삶’(生)을 통해 역사는 진화하는 것이라는 확신 또한 그 가슴에 충일해 있었다.
함석헌이 말하는 그 ‘실패하기 위하여’ 온 또 한 사람이 장준하였다. 이미 함석헌과 일신이 되었다고 하리만큼 친(親)한사이가 되어있는 장준하였지만 본래(本來)의 성품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함석헌을 ‘생각하는 사람’이라 한다면 장준하는 행동하는 사람이기 보다는 ‘일을 만드는 사람’이었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9일(1964.9) 저녁, 대통령 박정희가 그간 40여일 가깝게 크게 논란을 일으켜온 「언론윤리위원회법」에 의한 「언론윤리위소집」을 내일 10일로 앞두고 그 전면 보류를 발표하자 장준하는 바로 이어 내일 「자유언론 수호연맹」 발족식을 갖는다는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물론 「사상계」사(社)의 사원들의 작업에 의해서였다. 전화를 돌린 횟수가 500에 가까웠다. 내일 오전 YMCA 대강당에서라 했다. 장준하가 함석헌에게 한 전화는 함석헌으로 크게 놀라게 했다.
“선생님, 그간 준비해 왔던 언론 수호위가 내일 출범합니다. 정계에서 윤보선, 학계에서 장이욱, 재야 법조계에서 이병린, 문예계에서 모윤숙 등 적어도 300명쯤의 뜻을 같이 하는 이들이 모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출범하는 조직의 대표를 선생님이 맡으셔야 합니다.”
함석헌이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첫째는 일이 너무 급진적으로, 둘째는 너무 일방적으로 이끌어 가는 듯 한 장준하의 독단(?)때문이었다. 함석헌이 선천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이 끌고 가는 것, 끌려가는 것이었다.
“아니, 무슨 그런 일이 있나. 일단 모일 사람들이 모여서 토론도 하고 의논도 해서 조직이름도 짓고, 조직도 거기모인 회중들이 결정을 해야지. 그 큰 조직을 말이오. 그리고 내가 대표나 위원장을 한다는 것은 격에 맞지도 않고...”
“선생님. 선생님도 이미 아시는 일입니다만, 제가 어디 이 일을 하루 이틀 준비했습니까? 처음 선생님과 언론자유의 수호, 신장운동을 위한 조직을 논의한 것이 벌써 3개월이 다 됐습니다. 그간 함께 힘을 합할 동지들을 직접 만나고, 전화하고, 사람 보내고 해서 이미 조직이 내밀히 다 이뤄져 있습니다. 선생님 그저 나서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함석헌은 후에 장준하를 이렇게 말한다. “무서운 이”, “참 겁 없는 사람”, “그저 일을 만드는 사람”
1966년 2월 중 몇 날을 그가 무의탁 출소자들의 공동체 운동에 쓰겠다면서 지키고 있던 강원도 고성군 간성면 소천리 소재 해발 600 높이의 첩첩산 <씨알> 농장에, 농장을 지키던 일군들은 다 떠나고 홀로 엎디어 지낸 날이 있었는데, 어느 한날 백설이 온 산을 뒤덮고 있었지만 온 몸을 땀으로 적시며 살림집 주변의 눈들을 환히 치우고 난 후 따듯한 온돌방에 누워 깊은 잠이 들었는데, 함석헌은 그 잠속에서 희한하다 해야 할 한 꿈을 꾼다.
한 한창나이의 사람이 옷을 다 벗기 우고 아직은 땅에 놓인 형틀위에 누워있는데, 이제 못을 박는 다고 했다. 그 사람은 그저 조용했다. 말이 없었다. 고통이나 발악의 부르짖음도 웅얼거림도 내지 않았다. 그 사람은 “나는 내 할 수 있는 것을 다했다. 이제 너희 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해라. 이것이 어찌 내일이냐 너희일이지...”
‘한창 일 할 나이’의 그는 그렇게 죽어갔는데 꿈에서 깨어난 함석헌은 그 후 바로 선약이 되어 있는 전남 진도의 그의 한 사랑하는 제자의 결혼식 주례를 위해 진도를 거쳐 다시 곧 바로 장준하를 찾아가는데, 함석헌의 뇌리에 그 꿈속의 십자가에 못 박힌 자와 장준하가 겹쳐지고 있었다! 함석헌에게 있어 장준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장준하는 내일 오전 10시 YMCA 강당에서 「자유언론수호연맹」 결성식이 있을 것이며 함석헌이 그 위원장이 되어야 하다면서 그 식순 마지막에 위원장의 피선연설이 있을 것이니 준비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함석헌은 장준하가 평소에 헛소리하지 않는 이라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이론의 제기 없이 따르기로 했다. 그리고 다음날 함석헌은 10시 대회참석을 위해 시간을 맞춰 집을 나섰다. 정각 10시 YMCA 대강당!
그야말로 강당은 초만원이었다. 한국의 이렇다 할 각 계의 인사들이 다 모였다 할 만큼의 회중이었다. 그 잘난(?) 사람들, 그 많은 사람들의 모임을 처음부터 끝까지 주도하는 이가 장준하였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모임은 장준하가 끌고 가는 것도, 끌려가는 것도 아니었다. 정확히 말해 함께 가는 모임이었다. 한 사람 예외 없이 “옳소, 좋소, 합시다!”였다.
결성대회는 선언문, 결의문, 박 대통령에게 보내는 메시지 및 연맹규약을 만장일치 박수로 채택하고, 장준하가 미리 함석헌에게 전했던 대로 위원장에 함석헌, 부위원장에게 김상협, 모윤숙, 장준하 3인을, 지도위원엔 장이욱, 이병린, 유창순, 박병권, 노진설, 안병욱 6인을 각각 선출했다.
대회는 선언문을 통해,
“자유언론을 위하여, 고난의 투쟁을 전개하지 않을 수 없는 사태를 슬퍼하면서도 바로 이 길이 국가와 민족을 위한 영광의 길임을 자부 한다”고 선언하고 「언론윤리위원회 법이 악법이라고 인정, 이의 폐기를 위해 노력한다. 어떤 정부, 어떤 집단, 어떤 공인이나 개인을 막론하고 자유언론을 침해, 저해하는 행위를 배격한다. 전체 언론인이 어떤 압력에도 불굴하며 또한 스스로 냉철히 규제함으로써 공명정대한 언론을 보위하도록 지원하고 촉구 한다“고 결의했다.
대회에는 발기인 외에 이인(李仁), 유창순(劉彰順, 전기획원장관), 정태섭(鄭泰燮), 한창우(韓昌愚, 경향신문사장), 양호민(梁好民, 서울대 교수), 박화성(朴花城, 작가), 홍현설(洪顯卨, 감리교신학대학장), 윤보선(尹潽善) 전 대통령이 참석, 연맹의 발족에 힘을 실었다. 연맹의 발족 전 장준하가 요구했던 대로 위원장으로 추대된 함석헌은 「역사의 진화와 언론」이라는 제목의 강연으로 「자유언론수호연맹」 출범의 모든 순서를 마치고 폐회했다.
함석헌은 장준하의 역할에 다시 한 번 혀를 둘렸다. 그리고 정확하게 이후부터 함석헌의 가슴 속에 장준하를 향한 이전과는 전혀 다른 「딴 맘」이 일기 시작한다. 장준하를 위해 무슨 일인가를 하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내가 장준하를 위해 무엇인가를 하고 싶다. 내가 장준하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함석헌이 이 「자유언론수호연맹」 발족 이후 갑자기 이전과 전혀 다른 일체감이 느껴지게 된 것은 이 사건을 통해 장준하에게서 함석헌 자신의 자화상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실패하기 위해 온 사람!” 바로 그것이었다.
어제 저녁, 박정희의 「언론윤리위원회법」 전면 보류성명에, 장장 40일여 그 철폐투쟁을 계속 해온 투쟁위원회가 중심이 되어 이제 투위를 자진해체하기로 언론회관에 전국언론인들이 모인 바로 그 시간, 장준하는 「자유언론수호」를 위한 투쟁을 역설하며 그 「연맹」의 출범을 선언했으니...
그것은 박정희의 권부로부터는 ‘한번 손 봐 주어야 할 것’이었고, 박정희와언론자유의 확보를 위해 싸움 해온 「제도권 언론」 쪽에도 못내 섭섭할 일이었다.
문대골 목사 webmaster@ecumen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