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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영화 <판도라>

기사승인 2016.12.21  11: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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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병학 목사의 <문화로 본 성서>

1. 판도라 이야기

판도라

금단의 상자를 열어 인류에게 고통과 병, 그리고 죽음을 선물한 여인 판도라. 그러나 그녀는 원래 인류의 재앙으로 만들어진 인간이었다. 박정우 감독의 영화 <판도라>(2016)는 핵발전소를 바라보는 아이들의 대화로 시작된다. “저 건물 안에 뭐가 들어있게?” “로봇”, “밥솥”이라고 주장하는 아이들과 달리, 어린 재혁(김남길 분)은 이렇게 말하고 주장한다. “건물 안의 상자를 열면 큰일 난다.”

판도라 이야기는 구약성서의 아담과 하와의 선악과 이야기처럼 사람이 왜 죽어야만 하는지를 설명하는 그리스판 죽음의 기원 신화이다. 『신통기(神統記)』의 저자인 그리스 서사시인 헤시오도스(Hesiodos)에 의하면 원래 판도라의 상자는 고대 그리스에서 식품 보존을 위해 사용되었던 피토스(Phytos)라는 종류의 항아리였다. 항아리가 상자로 바뀐 것은 르네상스 시대 이후라고 볼 수 있다. 

헤시오도스에 의하면 판도라 이야기는 거인 프로메테우스(Pro-metheus, 앞을 보는 자)와 신들의 왕 제우스 사이에서 일어난 싸움 속에 등장한다. 거인 프로메테우스는 신들 중에서도 특출한 지혜를 지닌 자이며 인간들의 편(혹은 인간을 창조한 자)이었다. 프로메테우스는 제물로 바쳐진 소의 몫에 대해 인간의 편의를 꾀하고, 제우스의 뜻을 거스르고 인류에게 불과 기술(문화)의 지식을 전달했다. 이로 인해 둘은 대립하게 되고 후에 프로메테우스는 카우카소스(Caucasus) 산 봉우리에 결박되어 오랜 시간에 걸쳐 독수리에게 간을 갉아 먹히는 형벌을 받았다. 그리고 제우스는 불을 얻게 된 복만큼의 재앙을 인류에게 보내주려고 했다.

제우스의 뜻에 따라, 우선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스토스는 흙으로 꽃조차 부끄러워하는 처녀의 모습을 만들어냈다. 지혜와 기술의 여신 아테나는, 그녀에게 여성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에 관한 재능과 띠와 옷을 선물했다.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는 그녀에게 사랑스러움을 주었다. 이처럼 신들이 계속해서 선물을 주고 마지막으로 제우스의 전령신 헤르메스가 그녀의 가슴에 거짓, 아첨, 교활함, 호기심을 채워주고 그녀에게 신들로부터 받은 ‘모든 선물’이라는 의미를 지닌 판도라(Pan-dora)라는 이름을 주었다.

헤시오도스가 “실로 판도라에게서 시작된 여성의 계보야말로 남자들에게는 최대의 재앙”이라고 말한 것처럼 판도라는 신들이 힘을 기울여 창조한 아름다운 재앙이었고, 남자가 결코 거절할 수 없는 매력적인 여성이었다. 제우스는 헤르메스에게 명하여 판도라를 프로메테우스의 동생 에피메테우스(Epi-metheus, ‘나중에 보는 자’로 형인 프로메테우스와 비교하면 다소 우둔) 앞으로 데려가도록 했다. 에피메테우스는 프로메테우스에게 “제우스가 보내는 선물은 인간에게 화를 미치기 때문에 받지 말고 돌려보내라.”라는 말을 들어왔었다. 그러나 에피메테우스는 이 말을 잊어버리고 판도라를 아내로 맞이했다. 이름에 걸맞게 그는 나중에서야 실수를 깨닫게 된다.

한편 에피메테우스의 저택에는 항아리가 하나 있었다. 그 안에는 인간에게 해가 되는 온갖 것들이 봉인되어 있었다. 하지만 헤르메스에게서 호기심을 부여받은 판도라는 그 안을 확인해보고 싶은 유혹에 시달리다가 어느날 결국에는 항아리를 살짝 열어보고 말았다. 그러자 그 안에서 죽음과 병, 질투와 증오 같은 수많은 해악이 한꺼번에 튀어나와 사방에 흩어지게 되었다. 판도라는 허둥대며 항아리를 닫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모든 해악은 풀려나와 버렸다. 유일하게 항아리 안에 들어 있었던 희망을 제외하고는. 이후 판도라의 호기심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여러 가지 재앙으로 괴로워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2. 각자도생의 시대

박정우 감독의 <연가시>(2012)가 개봉되었던 4년 전, 영화는 시스템을 액면 그대로 신뢰하지 말고 개인의 자율적인 판단에 따라 재앙을 극복해야 한다는 각자도생의 가치관을 보여주었다. 그라고 그때나 지금이나 영화 속 인물들의 각자도생은 여전하다. <영화> 판도라는 방사능과 망가진 시스템, 두 가지 재난 속에 원전 사태를 직접 마주하게 된 시설 직원들의 이야기와 재난을 대피하는 지역 주민들의 피난 상황, 그리고 (원전 사태가 자연이 아닌 인간이 만든 재앙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이 사태를 수습하지 못한 정부와 공기업의 무능함도 함께 보여주지만) 재앙의 순간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대통령과 정부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젊은 패기와 달리 정치적 압박에 시달리는 대통령, 사태 수습보다는 은폐에 집중하는 총리와 내각, 부서별 이익과 이해타산을 우선시하는 공기업과 행정부의 행태는 지금 대한민국의 현실과 별반 다르지 않다.

역대 최대 규모의 강진에 이어 원자력 폭발 사고까지 예고 없이 찾아온 초유의 재난 앞(이러한 재난을 묘사하기 위해 CG부분에만 2년에 가까운 시간을 투자했다고 한다. 영화 전체 2,419컷 중 CG 작업 분량만 1,322컷인데, 이는 영화의 60%에 해당된다.)에 한반도는 일대 혼란에 휩싸이고 믿고 있던 컨트롤 타워마저 사정없이 흔들린다. 방사능 유출의 공포는 점차 극에 달하고 최악의 사태를 유발할 2차 폭발의 위험이 다가온다. 어떻게 할 것인가?  

영화 <판도라> 포스터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죄의 문제: 시민의 정치적 책임』(엘피, 2014)에서 이렇게 말한다. “죄에는 4가지가 있는데, 첫째 법률가의 관심사인 법적인 죄, 둘째 인간의 운명에 공명하고 예술가적 인간에게 영감을 주는 형이상학적 죄, 그리고 윤리학자나 정치철학자들의 사유를 진작시키는 도덕적 죄와 정치적인 죄가 있다.” 법적인 죄는 소수의 독일인 전범들, 정치적인 죄는 독일 국적자 시민 전체, 도덕적 죄는 나치의 만행을 방관한 독일인들을 포함한 유럽인들, 그리고 형이상학적 죄는 수용소 생존 유대인을 포함한 인류 전체로 넓어진다. 영화 속(지진이라는 자연 재해를 빼고) 공기업 직원들이 법적인 죄에 해당 될 것이고, 정치적인 죄는 총리를 비롯한 행정부, 그리고 도덕적 죄는 재혁의 어머니를 비롯한 대한민국 국민 전체, 그리고 형이상학적 죄는 재혁을 포함한 인류 전체라고 할 수 있겠다. 

최악의 사태를 유발할 2차 폭발의 위험을 막기 위한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문은 사람들이 떠난 텅 비어 버린 공간 속에서 저 혼자 떠든다. “살아서 나올 수 없는 곳으로 들어가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가족과 이웃을 살릴 사람이 필요합니다. 무능한 정부를 대신해서.” 야스퍼스에 의하면 권력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숙명 때문에 우리 인간은 ‘피할 수 없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고, 이를 극복하는 것은 ‘정의와 인권을 실현하는 권력을 지지하는 것’이다. 따라서 정의에 봉사하는 의미에서 권력투쟁에 함께 나서지 않는 것도 ‘정치적인 근본 죄이자 도덕적 죄’가 된다. 따라서 야스퍼스는 이렇게 말한다. “‘모두가 죄인’이라는 사이비 교리와 ‘나만 무죄’라는 속물적 윤리 모두를 배격한다.… 침묵하는 태도 또한 ‘가면’이다.… (죄와 책임을) 회피하는 태도는 반드시 경계해야 한다. 회피적인 태도에서 자라난 마음은 은밀하고 무해한 욕설로 해소되고, 냉혹한 불감증, 광적인 격앙, 표현의 왜곡을 통해 무익한 자기소모에 이른다.” 따라서 영화 <판도라>는 무익한 자기소모를 넘어 ‘유익한 자기희생’을 보여준다. 

3. 한 사람의 죽음

십자가상의 예수의 절규

대통령의 호소로 발전소 직원인 재혁과 그의 동료들은 저장수조 바닥 균열공사를 위해 발전소 안으로 들어가기로 다짐한다. (이제부터 영화는 신파의 극치를 이룬다. 그러나 이러한 신파는 물론이고 영화의 완성도와 별도로 공감이 되는 것은 지금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이 아닐까? “사고는 지들이 쳐놓고는 국민들 보고 죽으라고 하네.”라고 말하지만 무익한 자기소모가 아니라, 유익한 자기희생의 길이다. 길섭(김대명 분)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거기서 일하던 기술자에요. 우리가 딱 이잖아요. 우리 밖에 없잖아요.” 재혁도 이야기 한다. “우리 가족들이 거리에 내팽겨 쳐져 있잖아요. 우리가 안 나서면 가족들이 다 죽어요. 억울하고 분하고 택도 없지만 우리가 해야 합니다. 우리 말고 들어갈 사람이 없잖아요.” 

원전 소장인 평섭(정진영 분)도 함께 들어간다. “소장님도 들어가나?”라는 질문에 “집주인이 안 들어가면 되나? 죽으러 가는게 아니라, 살리러 간다 생각해라.”고 말한다. 이처럼 시민의 정치적 책임이 역설적으로 드러난 적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저장수조 바닥 균열은 너무 심해, 바닥을 폭파하여 지하 창고 전체를 저장수조로 만들어야 제2의 폭발을 막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직원 가운데 폭약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은 한명 뿐, 재혁이 바로 그였다. 이제 한 사람의 죽음으로 핵발전소의 폭발을 막아줄 것이며 인류는 구원받는가? 

지하창고를 떠나려는 동료들에게 재혁이 이렇게 말한다. “우린 천국 갈깁니다. 그죠? 내 먼저 갑니다. 천천히들 오이소.” 폭파전 재혁은 어머니와 대화하고 싶어 한다. 재혁의 말이 (그 유명한) ‘JTBC 화면’을 타고 가족들에게 들린다. “먼저 가서 미안하고 인사도 이래해서 미안하고, 내 먼저 가가 아버지, 행님 잘 챙길게.” “우리 삼촌 어디가는데?”라는 조카의 말이 관객을 울컥하게 만든다. “행복 하고 싶은데, 그게 와 안돼나? 그게 뭔 큰 욕심이라고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래 죽어야 하노? 이래 죽기 싫다. 억수로 무섭단 말이다. 엄마, 엄마… 엄마?, 엄마! 무서워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태복음 27:46)” 부르짖는 예수의 외침이 제2의 선악과인 핵발전소 안에서 재혁의 외침으로 들린다.  
“안 그럴라고 했는데, 찌질 하게 와 이라노? 잊지 마라, 기억해주라. 잘들 있으래이. 재혁아 산다꼬 욕봤대이.”라는 재혁의 이 마지막 말은 “다 이루었다!(요한복음 19:30)”는 예수의 선언과 같지 않은가?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로마서 5:17-19).”

4. 이름을 기억해 주세요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 (신명기6:4-9)

철학자 플라톤에 따르면 우리는 지각할 수 있기 때문에 기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기에 지각한다. 우리가 나무를 나무로, 꽃을 꽃으로 지각할 수 있는 것은 나무와 꽃에 대한 원초적 기억인 산과 바다의 이데아(idea)에 대한 기억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따라서 인간이 지식을 얻는 학습 과정은 영혼 깊숙이 숨겨져 있는 이데아가 밝혀지기 때문이고 지식은 순수한 영혼이 과거에 보았던 것을 우리 몸이 기억해내는 것이며,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것을 재발견하는 것이다. 이러한 플라톤의 기억 이론인 상기론(anamnesis)은 인간 존재의 본질적 특성이 추억을 소환하며 기억의 귀환을 당연시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고대 그리스인들의 진리 개념인 알레테이아(a-letheia) 역시 마찬가지이다. 망각(lethe)하지 않는 것,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 진리이다. 예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한복음 14:6)”라고 한 것은 예수의 길, 예수의 삶을 망각하지 말고 기억(알레테이아)하는 것이 참 생명의 길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기억은 이 각자도생의 헬조선 시대에 화두가 된다. 

우리는 무언가를 기억하기 위해 기념비(전직 대통령들의 기념관 등)를 세우고, 기록보관소를 만들고(세월호 관련 저 엄청난 SNS상의 담론들을 보라) 기억의 조형물(위안부 소녀상처럼)들을 세운다. 

세월호 희생자들
광화문 세월호 광장 미수습자 사진들

나치 정권에 학살당한 600만 명의 유대인들을 기억하는 예루살렘의 야드 바셈(Yad Vashem, 이름을 기억하라) 홀로코스트 기념비에는 ‘망각은 추방으로 이끌고, 기억은 구원의 비밀로 인도한다(Forgetfulness leads to exile, while remembrance is the secret of Redemption)’는 말이 기록되어 있다. 야드 바셈은 “나의 집, 나의 울 안에 그들의 송덕비를 세워주리라. 어떤 아들 딸이 그보다 나은 이름을 남기랴! 나 그들에게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이름을 주리라”는 이사야 56:5절 말씀에서 인용되었다. 이스라엘 안의 이방인들(특히 이사야 본문에 의하면 ‘고자’로 배척받는 이들로 이 세상에서 쫓겨난 사람들, 추방당한 사람들, 배제당한 사람들, 분배의 몫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 슬픔과 고통의 원인을 국가적 횡포가 막아 더 큰 아픔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부르시어 이스라엘의 아들과 딸들보다 더 나은 이름을 주며 ‘기억’하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의 표명이자, 하나님의 기억의 귀환이다. 나아가 그리스도교 예배의 모든 절차는 기억의 귀환이다. 예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관한 반복적 상기는 공통된 기억의 반복이며 이를 통해 신앙적 전통이 연결되는 것이다. 따라서 기억의 귀환은 신앙의 본질적 토대가 된다. 

따라서 대표적인 그리스도교의 성례인 성찬에서 포도주와 떡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나누는 것은 그의 삶과 죽음을 기억하는 것이다. 이러한 성찬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고난을 기억하고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일진대, 그렇다면 기억은 단순히 의지적인 머릿속 작용만이 아닐 것이다. 사실 기억은 기억하는 사람과 기억되는 대상 사이를 연결시킨다. ‘참여적 행동’으로 이끄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억하는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생명을 바쳐 사랑했던 이들의 고통과 고난을 외면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기억해야하는 것이다. 용산 참사, 밀양과 강정 마을, 세월호, 메르스 사태, 백남기 농민의 죽음, 최순실과 박근혜, 광화문과 서면의 촛불 등 잊혀져가는 것들이 너무 많다. 기억의 길이는 가슴으로 느낀 아픔의 길이와 비례하건만, 아직도 아픔은 망각의 강으로 떠날 줄을 모른다. 

고대 이스라엘 공동체는 기억의 회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온 이들이다. 유대인들은 유월절에 쓴 나물을 먹으며 선조들의 출애굽과 광야에서의 고난을 후손이 기억하고자 한다. 따라서 유월절 식탁에서 자녀들은 쓴나물을 먹으며 부모에게 이렇게 질문한다. “왜 우리가 이 쓴 나물을 먹어야 합니까?” 부모는 이렇게 답한다. “조상들의 고난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억하기 위해서!”

이 말은 기억을 통한 신앙의 본질을 잘 보여준다.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부지런히 가르치며, 강론할 것이며, 기록하라는 신명기 말씀도 여기서 그리 멀지않다. <판도라>에서 재혁의 숭고한 선택과 죽음 앞에 대통령은 “그 친구”라는 말로 재혁을 부른다. 그러자 소장은 이렇게 말한다. “그 친구가 아니라, 강재혁입니다.” 대통령은 이렇게 말한다. “기억하겠습니다!” 이름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름은 사건이고, 사건은 아픔이고, 아픔은 희생이고, 희생이야말로 구원으로 이끄는 역설적 진리이기 때문이다.     

5. 두 번째 선악과

다시 판도라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후대의 많은 사람들은 왜 희망이 나쁜 것들과 함께 항아리에 봉인되었을까를 질문했다. 희망이라는 것은 어느 때에도 인간을 버리지 않으며 이것을 품고 있는 한 밑바닥까지 추락하는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그 결과 헤시오도스의 원작에 후세 사람들은 제각각 이 이야기에 수정을 가했고, 현재 폭넓게 통용되고 있는 판도라의 주제는 이렇다. ‘마지막으로 남겨진 유일한 희망’은 곧 ‘무슨 일이 있어도 인간을 버리지 않는 유일한 구원’으로 인식되고 ‘재앙을 초래한 여자 판도라’라는 이미지를, ‘마지막 희망을 안고 일어서는 기특한 여인 판도라’로 변화시켰다. 영화 제목이 <판도라>인 것은 희망을 말하고자 함인가? 신파조로 어머니의 눈물과 사랑을 보여주며 희망은 거기 있다고 말하고자 함인가? 그러나 현실은 영화보다 더 비극적이다. 

에스키모인들은 늑대를 잡을 때 칼을 잘 갈아서 날카롭게 만든 다음 칼날에 동물의 피를 흠뻑 묻혀 얼린다. 그리고 날카로운 칼날이 위쪽으로 오도록 향하고 땅속에는 칼의 손잡이를 박아놓는다. 그러면 피냄새를 맡은 늑대들이 와서 칼날을 핥는다. 얼어서 무감각해진 늑대의 혓바닥은 어느새 날카로운 칼날에 혀를 베이게 되고 늑대는 자신의 피맛에 끌여 더욱더 빠른 속도로 칼날을 핥는다. 죽음에 이를 때까지 말이다. 피냄새에 이끌려 이성을 잃는 순간 늑대의 일생은 끝나게 되는 것이다. 

후쿠시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핵발전소 정책을 펼치는 정부를 바라보며, 늑대가 생각이 난다. 박근혜 정부는 2035년까지 원전을 현재 23기에서 최소한 39기 이상으로 늘리는 것을 뼈대로 한 에너지 정책을 공식화했다. 유럽연합 등 선진국들은 세계 최고의 핵 기술과 안전시스템을 자랑하는 일본의 후쿠시마 사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지만, 정작 일본의 이웃 나라인 대한민국은 태연하다. 국가권력과 야만적 기업가들에 의해 지속되는 핵발전소는 희망이 들어있는 판도라의 상자가 아니라, 인류가 손에 넣어서는 안 되는 두번째 선악과이다. 따라서 후쿠시마 원전 사고(와 경주 지진)는 인류에게 보내는 하나님의 경고요, 지구생명의 경고이며, 칼 날에 묻은 자신의 피를 핥는 어리석은 늑대와 같은 우리 대한민국에게 들려주는 마지막 음성이다.

사실 뉴스가 취재하고, 다큐가 비판하며, 행정부가 밝히고, 정치인들이 경계할 일을 영화 <판도라>가 ‘신파조의 영상’과 ‘뛰어난 CG’로 수행했다. 영화 <내부자들>이 현실이 되었듯이, <판도라>도 현실이 되지 않기를 기도하지만, 실재 현실은 결코 판도라와 같은 희망은 없다(물론 영화는 재혁의 말로 희망을 이야기한다. “핵발전소가 싫은게 아니고 무서운 거다. 낡아 가는데 걱정도 없고 관심도 없다. 나 몰라라 하는 거다. 우리가 아니라 민재 같은 아이들을 위해서. 우리 아이들한테 잘사는 세상 물려주고 싶나? 안전하고 편안한 세상 물려주고 싶나? 무섭다고 겁먹지 마라. 판도라에 희망도 있다.”). 따라서 두 번째 선악과에는 한사람의 또 다른 숭고한 죽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 죽음을 망각하지 않고 기억하는 다수의 사람들이 필요한 것이다. 바로 이 글을 읽는 당신을 포함해서! 

필자소개

 

   
▲ 최병학 목사
남부산용호교회 담임목사인 최병학 목사는 경성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로 쿠바, 인도와 동학 관련 영화 프로젝트도 수행하고 있다. 저서로는『영상시대의 종교와 윤리- 타락을 통한 구원받기』 (인간사랑,2002)을 시작으로 최근 『신학과 예술의 만남: 테오-아르스』(인간사랑, 2016) 등 12권의 저서가 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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