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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들이 소리 지를 것(누가 19:36~40)

기사승인 2016.12.05  10:4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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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12월 4일 대림절 둘째주일 설교

*영상설교: youtu.be/VBeAL_w1_FI

 

■ 주간 단상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제30회 인권상 – 자백

1) 12월 10일 인권의 날을 기념하여 한국교회도 매년 인권주일을 선포하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는 인권상을 수여하고 있다.

올해 30회 수상식이 12월 1일(목) 열렸고, 올해는 특별히 영화 ‘자백’을 만든 최승호 감독(우리에겐 PD가 더 익숙하다)을 수상자로 결정했으며 식에 앞서서 영화를 서울극장 인디스페이스에서 관람하였다.

며칠 전 JTBC 뉴스 앵커 브리핑에서 손석희 앵커는 고백과 자백을 구분했지만 내가 볼 때 사실 이 둘은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고백이나 자백이나 자신의 잘못을 신 앞에서 말하듯이 거짓 없이 하얗게 다 털어놓는 것을 뜻한다. 영어로는 둘 다 confession이다. 차이가 있다면 고백이 좀 더 종교적이고 자백은 좀 더 법률적인 상황에서 사용한다는 정도일 것 같다. 성경에서는 고백과 자백이 같은 의미로 쓰이고 있다.

2) 중요한 것은 자백(自白)이 말 그대로 스스로 거짓 없이 행해졌느냐의 문제다. 여기서 최승호감독은 서울시 공무원 유우성 씨 간첩 조작 사건과 75년 재일교포 간첩단 사건 등 우리 현대사에서 수많은 간첩 사건에서 간첩이라고 자백한 이들의 자백이 사실은 권력기관의 강요에 의한 것이었다는 점을 조명했다. 강요된 자백은 이미 자백이 아니다. 더 나아가 강요의 정도가 끔찍한 폭력, 감금, 협박 등 민주사회 시민의 기본권을 유린하는 조작이었다면 이것은 자백을 만든 권력기관의 비인간적 범죄라는 것을 밝힌 것이다.

우리가 다 알 듯이 실제 탈북자 유우성 씨는 간첩이 아닌 것으로 최종 대법원 판결을 받았지만 그 과정에서 수 년 동안 말 못할 고통을 당했다.

함께 살고자 데려온 동생 유가려 씨는 6개월 동안 독방에 갇혀서 온갖 회유와 공포, 폭력 속에서 오빠가 간첩이라는 허위 자백을 할 수 밖에 없었다. 20대 그녀의 독방엔 CC TV가 설치되어 있어서 24시간 감시받았고 심지어 화장실도 상반신 이상은 화면에 드러나서 샤워도 변기 뒤에 쪼그리고 숨어서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 장면들을 화면으로 누군가는 보고 있었을 것이다.

재일동포 간첩단 사건으로 고문당하고 간첩으로 조작된 김승효 씨는 그 후유증으로 정신병에 걸렸고 이제는 노인이 되었지만 마지막에 이런 말을 쏟아냈다 “한국은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나라다. 한국이 얼마나 나쁜 나라인지 말하고 싶습니다.”

3) 자백을 위장하여 조작을 일삼은 조직이 바로 국가정보원(National Intelligence Service)이다. 이게 국가가 세운 서비스 조직인가? 아무 죄도 없는 선량한 사람들, 특히 약점을 지닌 탈북자나 재일동포 등을 잡아다가 고문하고 심지어 중국 공문서 위조해서 간첩을 만드는 이 괴물조직이 정말 국가 서비스 조직이란 말인가? 한국 현대사에서 국정원이 만든 간첩 조작 사건이 얼마나 많은지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 그 자막을 보면서 가슴이 찡하다.

70년대 간첩 조작 사건이 가장 많이 일어난 70년대 국정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에서 이런 일을 담당했던 핵심인물이 바로 김기춘이었다고 한다. 그가 대통령의 비서실장으로서 왕실장이라고 한다. 이번 국정 농단을 파헤칠수록 바로 이 인물이 깊게 관련되었을 것이라는 증거가 나타나고 있다.

4) 어떻게 매듭을 풀어야 할지 가는 곳마다 비밀조직 국정원의 벽에 부딪치는 어려운 작업에 온 몸을 바쳐 헌신한 최승호 감독과 뉴스타파, 그리고 민주화를위한 변호사회의 노고에 깊이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1. 메시아의 예루살렘 입성

1)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도성이다. 3천 년 전, 다윗이 처음에는 유다지파 만의 왕이었다가 이스라엘 12지파의 왕이 된 다음에 여부스 족이 살던 천혜의 요새인 예루살렘 성을 정복하고 이스라엘의 수도를 만든다. 하나님의 법궤를 옮겨와서 종교와 정치의 중심지로 삼은 이후로, 예루살렘은 그냥 하나의 도시가 아니라, 이스라엘 역사의 중심지요 하나님이 거하시는 도성이요, 하나님이 은총의 날개로 품으시는 보호처였다. 주님이 오늘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는 것은 메시아로서의 구원 사명을 다하기 위한 결단이었다.

2) 조토, 예루살렘 입성, 200*185cm, 1306년, 이태리 파도바 스크로베니 예배당

르네상스 미술의 선구자인 조토가 이태리 파도바의 작은 예배당 벽에 그리스도의 일대기를 그림으로 남겼다. 그 중 하나인 예루살렘 입성이다.

주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다. 비록 말이 아니고 겸손하게 나귀를 타셨지만 순교를 상징하는 붉은 옷의 주님 자태는 당당하며 오른손을 들어 축복해 주신다.

그 뒤를 제자들이 따르고 있고 아이들은 주님 오시는 길에 나와 흔들기 위해 올리브 나무에 올라가 가지를 꺾고 있다. 진짜로 저렇게 올라갔으면 매우 위험하지만 700년 전 화가에게 그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다. 올리브는 승리의 상징으로서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나 곧 부활하여 승리할 것을 암시하고 있다.

성문 앞에는 사람들이 나와서 존경의 눈초리로 주님 일행을 맞이하고 있다. 한 사람은 이미 자기 옷을 말발굽 아래 깔았고, 또 한사람은 자신도 옷을 길에 깔기 위해 아주 실감나게 벗고 있다. 지금 우리의 눈으로 보면 신기할 것 없는 그림이지만, 르네상스 이전 사람들에게 그 변화를 몰고 온 선구자로서 조토의 그림은 놀라움이었다.

3) 그림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오늘 본문은 이어지는 또 하나의 에피소드를 보도하고 있다. 예루살렘 성의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영한 것은 아니었으며, 오히려 못마땅하게 여기던 이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바리새인들로서 주님과 늘 충돌하였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물론 성경에는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라고 되어있지만 당시의 역학관계에서 보면 이것은 부탁이나 청원이 아니라 거의 협박에 가까웠을 것이다.
도대체 예수님의 제자들이 무엇을 했길래 바리새인들의 심사가 뒤틀렸고, 굳이 예수님께 야단치라고까지 했을까?

4) 제자들은 주님을 뒤따르면서 예루살렘 입성하는 예수님을 찬양했다.

그 찬양이 바리새파의 심기를 건드렸다.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37~38)”

지금 나귀 타고 들어오는 예수를 향하여 제자들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라고 큰 소리로 노래했다. 이 왕이 문제였다.

우주의 왕 그리스도 : 오른 손바닥에는 못 자국이 선명하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끔찍한 사형을 당한 죄목도 ‘유대인의 왕’이었다. 왕은 지금 세속적 권력을 쥐고 있는 이들에게는 매우 불쾌하고 위험한 명칭이다. 현재 왕이 있는데 새로운 왕이 온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라는 것은 이제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진다는 것이었다. 로마 황제나 이스라엘의 총독들은 군사력을 가지고 사람들을 억압하고 처형하며 질서를 유지하고 식민지를 경영했다. 그 곳에 하나님의 뜻은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당연히 억압, 폭력, 착취, 불평등, 원망과 고통이 촘촘하게 채워져 있었다. 이러한 나라에 이제 주의 이름으로 새로운 왕이 오시면, 생명, 평화, 정의, 사랑이 충만한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린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선 기존의 불의한 질서는 타파되어 무너지고 그 다음에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혁명이다. 이를 달가워할 권력자들이 어디 있겠는가? 이것은 반란죄에 해당한다. 우리로 치면 우는 아이도 그칠 내란죄, 국가보안법에 걸리는 무거운 죄라고 예수님에게 소리치면서 당장 그만두게 하라고 윽박지르고 협박한 것이다. 실제로 이 협박이 이루어져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처형당한 것이다.

2. 교회의 사명 : 소리지르라!

1) 얼핏 보아 의아한 것은 바리새인들의 이 엄중한 요구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이다.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40절)

상상을 넘어서는 주님의 강경 대응이다. 바리새인들은 차마 이런 대답이 돌아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진짜 돌들이 이렇게라도 소리 지르겠는가? 이 사람들이 지금 높이 소리 지르는 것은 인간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소리 높여 외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안 하면 저 돌들을 동원해서라도 소리 지르게 하실 것이다.

2) 숨 막힐 것 같은 세상에서 교회는…
일제 강점기 때 우리 선조들은 숨죽이며 살았다. 하고 싶은 말, 외치고 싶은 말을 목구멍에 꾹꾹 누르며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해방이 되었을 때, 삼천리 방방곡곡은 누가 소리치라고 하지 않아도 감격의 아우성이 울리는 함성의 도가니였다.
아무도 쉽게 메시아의 도래를 말하기 어려울 때, 세례 요한이 홀연히 나타나 자기 자신을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라고 했다. 소리는 하나님 나라와는 반대인 불의한 세계를 새롭게 하는 힘이다. 자유와 해방의 함성이다.

교회는 바로 이 소리를 지르는 공동체다.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세상에 힘차게 선언하는 모임이 교회다. 우리가 안 하면 돌들이라도 소리칠 것을 외치는 이들이 교회다. 마땅히 소리 질러야 할 이 땅의 교회들이 침묵한다면 주님은 그 촛대를 옮겨서 다른 것들로 사명을 감당하게 하실 것이다. 그것은 곧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전제한다.

3. 대림절 : 소리 지르는 절기

1) 메시아 탄생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절기, 대림절이다.

지금은 내 마음이 불안하고 평화가 없지만 메시아가 탄생하시면 하늘의 평화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내 자신에게 소리 지르라.
지금은 우리 가정에 경제, 관계, 우환, 건강 등 여러 문제로 걱정이 앞서지만 메시아가 오시면 모든 근심 걱정 사라지고 그 곳에 그리스도의 평강이 임하실 것이라고 가정에서 찬양하고 큰 소리로 외쳐라.
지금은 일터가 위태롭고 안정되어 있지 않아서 힘들지만 메시아가 내 일터에 오시면 모든 어려움이 해소되고 새로운 도약이 시작될 것을 믿고 소리 지르라.

2) 대통령의 세 번째 대 국민 담화를 보면서 우리는 모두 큰 실망과 분노에 사로잡혔다.
자신은 직접적으로 책임이 없으며 이제 해 보려면 해 보라는 식이다.
성탄을 기다리면서 교회 외벽에 현수막을 걸었다.

그리스도의 영광과 평화는 하늘의 권세를 스스로 버리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이루어졌다. 구원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오시는 것에서 시작한다! 기독교 진리의 첫 걸음이다.

주님이 하늘에서 이 땅에 오신 것과 대통령이 국민의 지탄을 받아 그 권좌에서 내려오는 하야(下野)는 본질, 목적, 격(格)에 있어서 비교할 수가 없다. 딱 한 가지 공통된 것은 그리스도의 인류 구원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심(Incarnation)으로 가능했듯이, 오늘 2016년 우리 국민 전체가 당하는 이 길고도 험난한 십자가의 과정을 끝내고 국민과 대통령 자신을 구원할 유일한 방법은 하야(下野)밖에 없다. 그 자리에서 책임을 통감하고 정말로 자신의 죄를 자백하면서 내려오는 것이 구원의 길이다.
교회는 이것을 외쳐야 한다, 우리가 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돌들을 통해 소리치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훈삼 목사(성남 주민교회)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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