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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 책 성서

기사승인 2016.10.24  13:5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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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중신학 이야기_이야기>

성서의 핵심은 <해방사건>이라고 봅니다. 그동안 민중신학에서 가장 많이 언급했던 성서귀절들이 바로 그 해방사건의 맥(脈)에 속하는 것들이었읍니다.1)

얼마까지 알아보고 오셨어요? 

“얼마까지 알아보고 오셨어요?” 이 말을 듣고 당신은 무엇을 가장 먼저 떠올리는가? 각각의 대답이 있겠지만, 나의 경우 이 질문을 듣고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소는 바로 용산전자상가이다. 지금은 과거의 위용을 잃어버렸지만, 여전히 용산이라는 이름은 내게 전자기기의 메카로 기억되고 있다. 아직도 나는 컴퓨터 부품을 사야 할 일이 있을 때 가격비교 사이트보다도 선인상가를 먼저 떠올리는 것을 보니 나의 취향도 참으로 ‘아재스럽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용산전자상가에 가면 가장 먼저 듣는 말이 “찾으시는 물건 있으세요?”이고 그다음 찾는 물건을 말하면 오는 대답은 “얼마까지 알아보고 오셨어요?”였다. 용산의 많은 상인이 이 한마디로 상대가 호구인지 아닌지 판별할 수 있었다고 하니 가히 마법의 주문이라고 할 수 있는 말이다. 90년대 중후반까지 용산전자상가 점원보다 전자기기의 시세에 대해 잘 알 방법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러다 보니 어린 시절 내가 즐겨보던 게임잡지에는 언제나 정가보다 비싸게 주고 게임, 컴퓨터부품을 사 왔다는 하소연 편지가 독자 투고란에 실리곤 했다. 언제까지나 영원할 줄 알았던 “얼마까지 알아보고 오셨어요?” 라는 말의 파워는 인터넷으로 전 세계의 전자기기를 가격비교 할 수 있는 시대가 되면서 급격하게 힘을 잃고 말았다. 그 결과 지금 용산전자상가는 호구들을 후려치는 것으로 입에 풀칠하던 사기꾼들과 함께 우직하고 정직하게 장사를 하던 가게들까지 모두 불경기에 허덕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용산엔 용팔이, 교회엔 ‘목팔이’

이게 용산전자상가만의 일일까? 나는 이 모습을 교회에서 겹쳐 본다. 용팔이2)들이 제한된 정보를 독점하고 “얼마까지 알아보고 오셨어요?” 라는 말로 손님들을 후려쳐왔던 것처럼 ‘목팔이’들 역시 성서 해석의 권위를 독점하고 “성경 어디까지 알아보고 오셨어요?” 라는 말로 교인들을 후려쳐왔다는 말이다. 한국 기독교에서 성서를 읽는 방식은 흔히 “축자영감설”로 불리는 성서의 한 획, 한 획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 적은 것이라는 믿음에 근거하고 있는데 안병무는 여기에 대해서 상당히 큰 의구심을 보인다. 한 마디 한 마디가 하나님 말씀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성서를 읽기 전에 교리라는 전이해가 있는 독해를 한다는 것이다. 

성서 어디에도 삼위일체라는 말이 나오지 않지만 우리는 삼위일체를 고려하여 성경을 읽어오지 않았는가? 성경 어디에도 낙태가 죄라는 말을 찾을 수 없지만 – 아마도 당신은 이 글을 보고 진짜 낙태가 성경에 안나오나? 하고 찾아보겠지... 그리고 개역한글과 개정에는 8번 새번역에 6번 그리고 공동번역에 3번 나오는 것까지 보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성경에 낙태라고 나온 단어의 본뜻은 유산에 가깝다는 것이 함정... - 많은 기독교인이 성경에 근거하여 낙태를 반대하고 있다(!).

무슨 생각으로 축자영감설을 만들었어요?

사실 축자영감설이라는 눈 속의 들보를 걷어내고 보면 복음서끼리도 순서가 맞지 않고 족보가 서로 틀린 데 도대체 어떻게 축자영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만 아무튼 축자영감설이라는 “성경 어디까지 알아보고 오셨어요?” 가 교회를 망친 주범 중 하나라는 것이다. 

그래서 어쩌라고 - 야훼만

이 글을 읽는 많은 분이 지금까지 뻔한 얘기를 뭐 이리 길게 하나 생각할 수 있겠지만 어떤 사람은 지금 마음속으로 이런 노래를 부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디로 가야 하죠? 아저씨 우는 손님이 처음인가요...?’ 그러면 성경을 어떻게 보아야 하나? 하는 질문에 닿는 것이다. 

내가 스무 살, 신학과 1학년이었을 때 성서 입문 첫 수업의 교수님 첫 마디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성경 그거 다 뻥이다.” 뭐... 어떻게 보면 아주 틀린 말은 아닐 수 있고 교수님이 그런 말을 함으로 학생들에게 성서를 자유롭게 볼 수 있는 눈을 띄워주려고 했던 것 같긴 한데 방법에서 느껴지는 뭔가 당혹스러움은 아직도 큰 기억으로 남아있다. 이 얘기를 왜 하는고 하니, 그다음 내가 던진 질문이 여러분의 질문과 가장 비슷하지 않을까 싶어서이다. 그래서 어쩌라는 것인가? 믿음 다 깨버리고 답을 안 주면 어떡하라는 것인가? 라는 질문이 내게 남았다. 

성서를 어떻게 읽고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성서를 어떻게 읽고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지난주 글에서도 나오듯이 안병무 선생은 사건을 통하여 성서를 바라볼 것을 권한다. 그리고 그 가운데 안병무가 발견한 가장 중요한 지점 중 하나는 ‘해방사건’ 과 ‘야훼만’을 부르짖은 예언자 전통이다. 안병무는 성서를 이야기할 때 ‘태초에 하느님이 말씀했다’ 라기보다는 ‘태초에 사건이 일어났다’ 고 말한다.3) 히브리들을 하나로 묶어준 출애굽 사건과 그 안에서 모두의 것을 사유화하는 지배권력, 그리고 여기에 저항하는 ‘야훼만’이라는 구호를 내건 예언자 전통이 성서의 큰 흐름이라는 것이다. 

‘야훼만’이라는 구호 아래에서 절대권력이 있을 수 없다. 절대권력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고 한 손에 잡을 수 없는 야훼만, 오직 하나님만 가지고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윗 왕조가 세워지면서 왕이라는 절대권력자가 생기고 법궤는 성전 안에 유폐된다. 신마저 성전이라는 종교적 공간, 제사장이라는 교권을 지닌 계급에게 사유화되어버린 것이다. ‘야훼만’의 시대가 끝난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야훼만’을 무섭게 외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이 예언자들이었고 바로 예수 사건이 ‘야훼만’을 지켜온 예언자 전통의 절정이라는 것이다. 

최대한 쉽게 쓴다고 해도 성서학에 대한 이해가 없이 쉽게 읽히지 않을 것을 걱정한 탓인지 안병무 선생은 끝으로 성서를 보는 열쇠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 열쇠를 전달하는 것으로 오늘의 이야기를 줄일까 한다.

끝으로 그러면 성서를 보는 열쇠는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민중 편에서!"라고 대답하겠습니다. 그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모든 것을 <당하는 자>의 편에서 보는 것입니다. 성서에서 주류를 이루는 커다락 맥은 바로 그런 것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이 당하고 있는 자의 해방>이 성서의 핵심 되는 목적이라고 보는데, 참 해석은 이런 해방사건에 참여할 때에야 비로소 가능하다고 주장할 수 밖에 없읍니다. 4)

*각주설명

1) 안병무, 『민중신학이야기』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0), 78.

2) 용산전자상가의 악덕상인을 낮춰 칭하는 말. 이 단어 이후로 낙팔이(낙원상가+용팔이), 테팔이(테크노마트+용팔이), 폰팔이(핸드폰+용팔이)등의 조어가 생기기도 했다.

3) 위의 책, 54.

4) 위의 책,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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