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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권의 탄압에 저항하는 민중혼(民衆魂) (8)

기사승인 2016.10.06  13:2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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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석헌과 장준하, 그리고 박정희>

함석헌과 장준하로 타오르는 민중혼

「막사이사이 언론,문학 부문상」의 수상 소감을 듣는 함석헌은 여기까지 싸워온 장준하가 한 없이 고맙고 미더웠다. 타는 목마름을 말끔이 가시워주는 듯했다.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받는다는 이상이 더욱 고맙게 여겨지는 것은 상도 상이지만 이 상으로 인해 이전 수개월에 걸쳐 계속 된 어쩌면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싶기까지 했던 수모들을 일시에 씻어 낼 수 있게 되었다는 데서였다. 쿠데타 정부에서 <부패언론인>으로 규정되면서 (쿠데타 정권은 1962년 3월 16일 「정치활동정화법」을 공포하는데, 동시에 4,374명의 부패언론인을 명시한다. 그중 하나로 장준하도 포함되었다. 필자 주)

장준하는 더 할 수 없는 치명상을 입게 된다. 김영선으로부터 지원을 받았던 그 돈 1000만원이 졸지에 부정자금이라면서, ‘국고에 반납하지 않으면 형사 처벌 외에 방법이 없다’며 계속되는 윽박이 두렵거나 부끄러워서가 아니었다. 평생에 스스로 의(義)로움과 정직(正直)으로 자산을 삼고 그 생의 도상에서 일보도 뒷걸음쳐 본적이 없다고 확신하는 장준하로서 견디어 낼 수 없는 것은 바로 치욕스러움이었다. 그 치욕, 그 수모는 장준하였기에 더욱 그랬다. 

함석헌은 다시 만난 장준하에게 「막사이 언론, 문학 부분상」 수상담을 들어보자 했던 것인데, 말을 꺼낸 장준하는 그 「막사이상」이 장준하 자신에게 얼마나 큰 기운이 되어주었는가를 보다 확실히 알리기 위해 그 상 이전까지의 군인 정치 집단으로부터 「사상계」가 겪어야 했던 탄압상을 이야기 하게 되었다. 

장준하는 막사이상 수상 직전, 그야말로 ‘죽을 지경’에 처했던 사상계에의 탄압상을 후에 다른 사람 아닌 바로 이제는 함석헌이 대표로 발행하는 월간지 「씨알의 소리」에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이렇게 돈 천만원 때문에 사상계는 사상계대로 망치면서 갖은 홍역을 다 치르자, 이번에는 ‘정치활동 정화법’이라는 것이 발표되면서 (1962년 3월 16일) 나는 소위 부패언론이라는 이름 아래 그 4,374명중의 한 사람으로 엮이게 되었으니 그 돈 천만원을 구실로 그동안 펴온 정론으로서의 앙화는 당분간 지속될 모양이었다.

그 정정법의 목적이 언론활동을 못하게 하자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정치를 못하게 하자는데 있는 것이므로 원래 정치에 직접 관심이 없는 나로서는 그 정정법이 한 형식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그러나 그로 인하여 내가 받은 타격은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다. 내가 부패 언론인이란 누명을 쓰고 정정법에 묶여있다는 것이 세상에 발표되자 내용을 알지 못하는 상당수의 독자들은 나에게 무슨 큰 흑막이나 있는 것으로 알고, 나를 의시하여 사상계까지 사 읽으려 하지 않는 것이었다. 평시 항상 5만부를 상회하던 판매 부수가 점차 줄어 6,7천부를 약간 넘는 선까지 떨어져 버리게 되었다.“

장준하의 명성도 「사상계」의 명성도 어처구니없는 전략을 피할 수 없게 된 때, 필리핀의 「라몬막삭사이사이상」 재단으로부터 대한민국의 사상계사 사장 장준하에게 그 언론, 문학 부분 수상자 선정 소식이 전해져 온 것이다.

“선생님, 그 상이 참 고마웠습니다. 사실은 ‘어떻게 해온 사상계인데... 이제 사상계도 죽어야하는 것 아닌가?’하는 때도 있었습니다. 선생님, 그런데 이 상이 제게 죽음도 이기는 길이 있음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장준하의 그 ‘씨알의 소리’의 글은 계속 된다

“실로 이때 하늘이 보낸 원군이 우리에게 있었다. 그해 한 여름 필리핀의 막사이재단이 1962년도 「막사이사이상 언론문학부분상」이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국내에서는 부패 언론인으로 낙인을 찍어 정정법으로 묶어 놓은 사람을 갖다가 외국에서는 「지식인들이 국가 재건에 정력적 참여를 촉진시키기 위하여 불편부당(不偏不黨)한 잡지를 발간함에 있어서 성실성을 나타냈고 금전상의 이익이나 정치적 권력을 잡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국의 새로운 세대를 계몽하여 그들로 하여금 보다 자유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길을 찾게 하였다」라는 수상결정서를 발표하고 상까지 주었으니 참 아이로니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으로서 일부 독자들한테 받는 오해는 저절로 풀린 것이고 나를 위시한 우리 사상계 동인들은 용기백배하였다.”

장준하는 막사이사이상이 수여된 다음 달의 사상계 (1962년 9월호)에 「우리의 자세와 할 일」이라는 주제의 권두언을 쓴다.

“사상계는 어느 개인의 것이 아니라 바로 한국민족의 것이요, 이 나라 방방곡곡에 퍼져 있는 「사상계」 가족을 위한 것이다....금권상의 이익이나 정치권력을 위해서가 아니라 누란에 처한 조국의 보다 나은 앞날을 위해 동지를 「메아리」로 해서 지식인과 독자들 간의 진지한 토론을 하게 하는 심포지움의 자리가 곧 사상계인 것이다.....「사상계」는 어떤 권력에 종사하기 보다는 이 민족의 정로(正路)에 봉사하며 자유사회 건설에 봉사하여야 하는 대 사명을 자각하고 있기 때문에 수많은 벽을 뚫고 나아가는 고통에서도 피곤을 모른다...고. 아무튼 사상계는 수상을 계기로 하여 가일층 예리하고 용감하게 군사정부의 불의 부정의 고발자로서 그 진정한 증언자로서 그들의 비정을 비판하고 참 민족의 진로를 제시하는데서 추호도 붓의 주저함을 허락지 아니하였다.”

함석헌은 장준하로부터 자신이 해외에 나가있는 동안 장준하 개인과 사상계가 겪어야 했던 고난사(苦難史)를 전해 들으면서 내심 자신마저 놀라게 되는 장준하와의 일체감, 그리고 자신에 앞서 생(生)을 마감하고 갈 듯한 예감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더욱 이상한 것은 이제까지 함석헌이 누구에 대해서도 가져본 적이 없는, “내가 너를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라도 마다하지 않으리라” 다짐하게 되는 것이었다.

“선생님, 그저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지금 제게 연결되는 군 계통의 정보에 의하면 군사정권이 결코 퇴진하지 않을 거라는 겁니다. 군(軍) 쪽의 흐름을 봐도 분명합니다. 특히 금년 들어 선생님 귀국하시기까지 정신적인 계층은 그만두고 일반적인 상식인들까지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행위들이 끊임없이 반복해 왔습니다. 지난 2월 18일엔 <민정참여포기>를 선포하고, 27일엔 시민회관에서 최고회의 의원들, 국군참모총장들, 재야지도자들이 참석한 자리에서 다시 <민정불참>을 천명했습니다. 그런데 그 천명이유가 웃기는 것이었습니다.

“고루한 타성적인 정치, 정치의식을 일소하고 구세대를 완전히 교체, 새 역사를 이루어보자고 목숨을 걸고 혁명을 했던 것인데, 이 같은 혁명정부의 노력이 이 나라 대다수 정치인들의 완고한 반대에 부딪히게 되었으며 급기야는 오늘 이와 같이 정부 계획의 후퇴와 양보로서 이 정국을 수습하자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본인은 지난 번 제안 (‘민정참여를 포기하겠다’ 한 2.18성명, 필자 주)에서 밝힌 바 있는 본인의 지킬 바를 다시 천명합니다. 본인은 민정에 참여하지 않겠습니다‘라고 공표한지 꼭 10일 후, 3월 7일 다시 이상한 소리를 합니다. 원주에서 한 발언인데, ’정계가 혼란해지면 방관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뉴스를 접하면서 이제 ‘민주주의는 어려워지겠구나!’하는 예감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런 후 며칠 지나 3월 11일, ‘군 일부의 쿠데타 음모적발’이라며 김동하, 박임항, 박창암하는 인사들은 체포, 구속합니다. 

선생님, 그런데 더욱 놀란 것은 이 조작된 쿠데타 음모적발 발표 불과 4일 후 3월 16일 ‘4년간의 군정연장안을 국민투표에 붙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같은 날 「비상사태수습을 위한 임시조치법」이 공포 되는가 했더니, 3월 22일 날은 국군 비상지휘관회의에 참석했던 고급장교들이 3.16성명을 지지한다면서, 별판을 단 군B차를 몰고 마치 역전의 개선군들처럼 대낮에 헤드라이트를 켜고 청와대를 향한다며 세종로를 시위 행진한 것입니다. 

선생님. 제가 분한 것은 군인들이 정치데모를 한다는 것보다도 견딜 수 없도록 가슴 여미는 것은 4.19가 학살당하고 있다는 사실에서입니다. 4.19의 젊은이들의 피는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해 뿌려진 것 아닙니까? 5.16이 4.19를 학살한 것 아닙니까?”

장준하는 쏟아지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후에 함석헌은 장준하의 ‘울음’을 이렇게 전했다.
“나, 사람이 그렇게 우는 것 첨 봤어. 말릴 수가 없더구먼...”
함석헌은 장준하더러 ‘계획이 있으면 말해보라’했다. 

“하라는 대로 하겠소. 무슨 일을 어떻게 하겠소? 계획이 있으면 말해보시오. 내게 그럴만한 속 힘이 있겠는지 모르겠소만, 장사장이 하는 말이라면 외면하지 않겠소. 감옥은 물론 더한 지경이라도 가겠소.”

장준하는 함석헌이 좋았다. 함석헌과 장준하의 아버지 장석은은 꼭 같이 1901년생이었다. 그런데도 장준하는 함석헌을 대할 때마다 영원한 길동무를 연상하곤 했다. 아버지 나이의 함석헌이 말이다. 

눈물을 거둔 장준하는 꼭 다시 뵙겠다고 했다.
“곧 시행해야할 일들의 계획표를 준비해가지고 선생님 댁으로 찾아뵙겠습니다.”
되돌아가는 함석헌은 으스스 전신이 떨려왔다.
역사의 광풍이 휘몰아 오고 있음을 예감하고 있는 것이었을까? 

문대골 목사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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