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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행하라

기사승인 2016.09.23  10:5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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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옥희 선교사 칼럼>

해마다 3월이 되면 장학금 생각이 절로 떠오른다. 우리 달릿 아이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1년 공부는 무사히 마치게 되었음을 감사드리며 새 학기 학비를 어떻게 공급하여 공부를 계속하게 할 것인가를 나도 모르게 고민하며 구상을 하는 것이다. 

작년에는 장학금에 대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차고 넘쳤다. 3월에 모금을 시작하여 11월 까지 총 51명에게 장학금을 지불하는 놀라운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그 중에는 치과대학교에 다니는 사라 매씨에게 극적으로 지급하게 된 960만원의 장학금이 포함되어 있다. 51명의 학생들이 우리 한국교우들의 사랑과 기도로 말미암아 책상에 앉아서 공부를 하며 미래를 꿈꾼다는 생각을 하면 피곤도 잊게 되고 모금하는 중에 상했던 마음도 다 사라지고 감사만 남는다. 

3월이 되면서 부담감이 커져서 하나님께 계속 말씀을 드렸다. 
“아버지, 올해는 무슨 수로 51명에게 장학금을 지불하지요. 저로서는 불가능합니다.” 
“하는데 까지 해보고 안 되면 별 수 없지요.”
하나님이 내게 물어 오셨다.
“그들이 네 아들딸이라면, 네 동생들이라면 어떻게 하겠느냐?”
“땡 빚을 내서라도 공부를 시켜야지요. 제 몸을 팔아서라도 학비를 대주어야지요.”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내 말씀하셨다.
“그래 그러면 그렇게 행하라.” 

하나님의 응답을 듣는 순간 기가 탁 막혔다. 내가 기대했던 대답은 ‘사랑하는 종아, 내가 너의 수고를 안다. 염려하지 마라. 다 준비되었다’는 말이었다. 하나님께 아뢰어서 혹을 떼려다 혹을 붙인 느낌이었다. 그대로 주저앉을 수가 없어서 볼멘소리로 대꾸하였다.
“알았습니다. 빚을 내겠습니다. 알았습니다. 제 몸 가져다 파세요.”

다행히 17명의 학생들은 매월 3만~ 5만원을 장학금 후원자들이 있어서 그 돈으로 지불을 할 수 있지만 나머지 30여명은 통째로 전부를 마련을 해야 하니 쉽지 않았다. 다양한 모금의 방법을 모색하였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결국 책 <사랑만이 가슴에 남는다>를 급하게 썼고 판매 수익금으로 장학금을 마련하기로 하였다.

5월 초순에 남인도 카림나가 노회의 르우벤 마크 비숍에게서 급한 메일이 왔다. 카림나가르 지역이 3년째 가뭄이 들어서 사람들이 마실 물로 인하여 극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어서 지도자로서 양떼들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어 모든 일들을 중지하고 30개 마을에 식수 개발에 총력을 기울이겠다며 도움을 호소하는 내용이었다. 

목마른 고통을 데칸고원을 순회하며 자주 목격한 나로서는 그 메일을 읽는 순간 목이 탔다. 밥 지을 물이 없어서 짜이 한 잔으로 식사를 대신하는 사람들, 사리 저고리를 한 번도 세탁하지 않고 몸에서 삭아질 때 까지 입었던 할머니들, 몇 달씩 머리를 감지 않아서 떡진 머리가 된 여인들, 물을 길러 먼 길을 다니는 아이들, 물 때문에 일어난 살인 사건 등등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당장에라도 샘을 파주고 싶은데 그럴 능력이 없으니 한 숨이 푹 터져 나왔다. 

비숍에게 답장을 보냈다. 
“마음은 원이지만 현재 장학금 모금 때문에 너무 바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물어 오셨다. 
“네 자녀들이나 형제자매들이 목마르면 어떻게 하겠느냐?”
“예. 빚을 내서라도, 제 몸을 잡혀서라도 샘을 파주어야지요. ”
그러자 하나님께서 바로 말씀하셨다.
“그래, 그럼 그렇게 행하라.”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항의를 하였다. 
“하나님, 제가 장학금 마련을 하기 위해서 날마다 책 팔러 다니잖아요. 별것 아닌 제가 책을 파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죄송하지만 장학금 지원이 끝나면 그 때 가서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그렇게 툴툴거리고 난 뒤에 슬며시 하나님께 제안을 하였다. 
“좋습니다. 제 고향집 마당에 있는 책이 기한 안에 다 팔리면 식수개발 프로젝을 하나님께서 제게 주시는 축복으로 받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닙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식수개발 프로젝에 대하여 일체 입을 열지 아니하였다. 하나님과 약정한 기한 안에는 일체 움직이지 않고 기도만하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기다리기로 하였던 것이다. 어떤 일로 인하여 희년교회 최장로님께 식수개발 프로젝을 위해서 기도를 부탁드린 며칠 후에 그 분의 연락을 받고 교회로 갔다. 전혀 예상 밖의 일이 벌어져 있었다. 그가 10개의 우물 개발비를 모아놓고 기다리고 계셨다. 나는 속으로 “어 어 하나님 벌써요. 아직도 약속한 기한이 남았는데 이렇게 일찍 응답을 해주시다니요.“ 말하면서 기막힌 사연을 귀담아 들었다. 

혼자 사시는 김은애권사님은 암수술을 받으실 때 교우님들이 주신 위문금으로 2개의 우물헌금을 해주셨다. 그는 교우들이 베풀어준 사랑에 감사해서 주일날 성도들에게 점심 대접을 하려고 하셨다가 생각을 바꾸셨다고 하셨다. 신타순집사님과 김경식집사님은 한두 달 전에 대형마트 코너가 문을 닫는 바람에 갑자기 실업자가 되셨지만 우물헌금에 동참해주셨다. 신명옥님은 교회에 발을 디딘지 얼마 되지 않는 초신자라고 하였다. 송숙집사님, 정현애집사님, 문영자집사님, 정은숙권사님, 희년교회 16목장 일동, 18목장 일동이 인도의 목마른 영혼들을 위하여 10개의 우물개발비를 보내주셨다. 이틀 후에 무명씨 헌금으로 10개의 우물개발비가 들어왔다. 그리고 이원택을 비롯한 우리 형제들이 우물헌금에 참여하기로 하였다. 

8월 초순 어느 날, 전화기를 꺼놓고 쉬는 사이에 뉴델리에 거주하는 이집사가 보이스톡을 수차례나 시도한 것을 확인하였다. 선교사들이 계속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인도 상황인지라 순간 큰 문제가 발생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바짝 긴장이 되었다. 뉴델리에서 나의 사역을 도와주고 있는 이집사님께서 “목사님, 매씨목사님의 상황이 너무 힘든데 저는 아무 도움이 못되어서 안타까워요.”라고 운을 떼었다. “매씨 목사님을 바꾸어 드릴께요.”

매씨목사는 30년 가까이 뉴델리의 띨락나가르, 빠델나가르, 라마뿌람 등지에서 나환자에게 복음을 전하며 그들의 친구로서 살아왔으며 지금은 뉴델리 변두리 나자부가의 뿌렘담고아원에서  200 여명에 가까운 고아의 아버지로서 사랑의 수고와 노고를 아끼지 않는 삶을 살고 있는 분이며 나는 18년 전에 그를 만나서 지금까지 서로 도우며 함께 하고 있다. 

매씨목사의 고난은 2014년 뉴델리 아동복지국의 아미따 티왈리 국장이 뿌렘담 아동들의 이름을 친 아버지를 찾아서 힌두 이름으로 교체하라고 지시한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 때부터 그는 언론과 힌두들의 공격의 표적이 되었다. 그의 음성이 신음처럼 들렸다.

“누님, 그들이 아이들을 빼앗아 가고 나를 파괴하고 있어요.” 
강제로 아이들을 빼앗기게 된 아버지의 아픔과 고통이 가득하였다. 
“매씨, 무슨 권리로 그들이 아이들을 빼앗아 가려고 하는 거야?”
“뉴델리의 아동복지국이 재판을 걸어서 우리 아이들을 다른 힌두고아원으로 옮기라고 명했어요. 경찰관과 복지국의 직원들이 법원의 결정대로 아이들을 빼앗아가려고 왔지만 아이들이 도망치고 발버둥치고 울어서 그냥 돌아갔어요.” 
“아동복지국이 당신과 뿌렘담 고아원을 고소한 진짜 이유가 뭐야?”
“누님, 아이들이 나의 자녀로 출생신고가 된 것, 그들이 크리스천 이름을 가진 것과 저를 따라서 기독교인이 된 것 때문이요.” 
매씨목사는 7월에 있었던 아동복지국과 힌두들의 협박과 감시에 몸서리를 치고 있었다. 
“누님, 기도해주세요. 그들이 아이들을 빼앗아 가고, 나의 미션을 짓밟고 나의 삶을 송두리째 파괴하고 있어요. 기도해 주세요.” 

그의 떨리는 음성을 듣는 나의 가슴이 떨려왔다. 몸과 마음과 뜻을 다해 나환자와 고아들을 사랑하여 몰아적인 삶을 살아온 그와 태어나자마자 바로 버림받은 아이들에게 자기들을 받아주고 사랑해준 아버지를 떠나라고 몰아대는 종교의 이름으로 가해지는 폭력과 학대가 무서웠다. 내 인생이 매씨목사와 함께 파괴당하는 기분이었고 내가 아이들과 함께 거리로 쫓겨나는 느낌이었다. 

그는 8월 9일까지 70명의 아동을 니르말호스텔로 보내라는 법원의 두 번째 명령을 무시하고 아이들이 학교에 가서 평안히 시험을 치룰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였다. 연속 법원의 결정에 불복종한 그에게 남은 것은 사건을 고등법원에 상고하는 길 밖에 없었다. 그는 변호사를 찾아서 상담하고 사건을 의뢰하였고 사면초가에 빠진 고통스럽고 힘든 자기의 심경과 상황을 토로하였다.

그는 공권력에 의해 감시와 조사를 당하여 많은 후원들이 끊겨서 아이들이 짜파티와 쳐트니를 먹는 것이 무엇보다 가슴 아파하였다. 전에는 학교들이 재량껏 고아들에게 교복, 책과 문구 등등 많은 시혜를 베풀어 주었는데 지금은 중단되어서 교육비가 그의 무거운 짐이 되었다. 건물 입구에 경찰들과 힌두들이 와서 자기와 고아들을 감시하는 것 때문에 스트레스와 두통에 시달리고 있으며 사람들이 자기를 피하는 것들도 감내하기 힘들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한 숨을 푹 내쉬면서 변호사비를 걱정하였다. 나는 다른 무엇보다 아이들의 건강이 염려되어 그들의 조악한 식사를 걱정하며 하나님께 아뢰었다.  

“아버지, 뿌렘담 아이들이 짜파티와 쳐트니만 먹고 지낸대요. 어떻게 하지요?”
“네 자녀들이 그렇게 약한 식사를 하면 네 마음이 아프겠지.”
“예 그래요.”
“아이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어라.”“예 그럼, 10월, 11월, 12월 후원금을 앞당겨 보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답변에 대하여 아무런 대답이 없으셨다. 
“그런데 아버지, 매씨목사가 고등법원에 상고하기 위해서 변호사를 선임했으니 그 비용을 어떻게 해요. 그가 변호사비용을 걱정하는 말을 듣는 순간 내 몫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어떻게 해요? 그 비용이 얼마나 많이 들지도 모르고 저는 아시다시피 빈손입니다.”
“이 때를 위해서 네가 준비되었으니 네 생각대로 그렇게 행하라.” 

나는 매씨목사를 통해서 수많은 나환자들을 사랑하며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며 매씨목사를 통해서 수많은 아이들을 보호하며 양육해주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지한다. 무엇보다 매씨목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셨음을 알기에 그의 고난에 기꺼이 동참하기로 하였다. 나는 하나님께서 매씨목사의 필요를 아시고 일찍부터 그를 위한 비용을 준비해주셨다고 믿는다. 며칠 전에 어느 분이 전화로 가장 절박하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 오셔서 “매씨목사와 뿌렘담고아원”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분은 필요한 금액을 송금하겠다고 하시며 전화를 끊었다. 

나는 계속 책을 팔러 다닌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부하고자 하는 자녀들과 목마르고 헐벗고 배고픈 자녀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당하는 자들을 위하여 ‘여호와 이레’로 준비해놓으셨다. 나는 그것들이 어디에 누구의 손에 있는지 잘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것을 확신하며 세상의 눈치를 보면서 부지런히 찾으러 다니는 하나님의 심부름꾼이다. 

<필자 소개>

한신대학교, 동대학원 졸업

영주중앙교회, 군산한일교회, 베다니집 등에서 시무.

1997년 전북서노회 파송 인도 선교사로 출발.

1999년 기장총회 파송 남인도 교단 선교동역자로 데칸고원 라열라씨마 일대에서 달리트 선교에 동참해 오늘에 이름.

2007년 7월 13일 전 인도 신학 협회로부터 명예신학박사 학쉬를 수여.

비전아시아미션 창립 이사(2005년 11월 30일)이자, 비전아카데미(지도자훈련원) 설립 이사(2006년 6월)

인도선교 10주년 기념시집 <비아돌로로사>, 선교 17주년 기념에세이 <선교사는 거지다>의 저자

<후원계좌>

국민은행 520702-01-176813 이옥희

이옥희 선교사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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