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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 엄니는 홍시를 좋아하신다

기사승인 2016.08.25  14:3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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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리의 늦게 가는 세상>

집 앞에 있는 망고 나무

창밖으로 보이는 싱그러운 망고나무를 보며 찐 고구마와 커피한잔으로 대하는 아침 식탁은 주말의 여유로움 보다는 황량함이 먼저 가슴에 스며든다.

오늘은 내 조국 한국이 더 그리운 날 인가보다.
이런 날은  한국에서 먹 던 홍시라도 먹으며 마음을 달래는 것도 좋으련만
지금쯤은 한국에서도 귀한 홍시가 동티모르 천지 어디에 있겠는가

내 친구는 단물이 쭉쭉 나오는 복숭아를 먹으며 행복감에 젖는다고 하고
내 딸아이는 외출하고 돌아오자마자 냉장고에서 막 꺼내 먹는 수박이 제일 맛있다고 하지만 나는 어떤 과일 보다도 한 겨울에 잇속에 닿는 차가운 감촉을 느끼며 먹는 달차근한 홍시가 좋다.

유달리 홍시를 좋아하시던 어머니처럼 나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홍시가 좋아진 것이다.

홍시..

내가 살았던 시골집 사랑채 뒤뜰엔 커다란 감나무가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언제부터인가 우리 집으로 오는 우편물엔 언제나 (감나무집)으로 주소가 마무리 되어 있었다.

감나무 집

해마다 뒤 곁에 감이 익어 가면 감나무 집 육남매는 토요일 오후, 어느 날을 잡아 주렁주렁 열린 감을 땄다. 남동생들은 나무에 올라가 손에 닿는 감은 직접 따서 아래로 던져주기도 하고, 가지 끝에 매달린 감은 감 가지를 부러뜨리기도 하면서 긴 막대기로 두들겨 따기도 했다.
 
언니들과 나는 동생들이 따주는 감을  받기도 하고, 바닥에서 줍기도 하였고, 깨진 감은 그 자리에서 발라 먹기도 했다. 따면서 받으면서 떨어 뜨려 깨지는 것도 많았지만, 그날은 감나무 집 육남매가 감을 따고 있다는 것이 온 동네방네에 웃음소리로 알려지는 날이었다.

우리 형제는 감을 한 곳에 모아 놓은 후 떨어진 감가지 중에서 감이 많이 붙고 보기에도 좋은 감 가지를 골라 방마다 벽에 걸어 놓은 후 감 따기 일과를 마무리 하였다. 

어머니는 감의 상태에 따라 덜 익은 것은 항아리에 넣고 소금물을 부어 우리셨고, 일부는 말랑말랑하게 익어가는 순서대로 먹도록 광주리에 담아 놓으셨으며 깨진 감은 깎아 말려 곶감이라 하기에는 어설픈 곶감을 만드셨다.

감나무

감나무 집으로 이사 오기 전까지 우리는 읍내, 아버지의 직장 뒤편에 있는 일본식 사택에서 살았다. 우리는 그곳에서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언제나 우리들을 가르칠 걱정부터 앞세우셨던 아버지와 만삭의 어머니와 우리 오남매, 아홉 식구가 아버지의 월급봉투만 바라보고 살았다. 그래도 우리는 그곳에서 이불하나를 서로 덮겠다고 끌어당기면서도, 찐 고구마 한 개를 더 먹겠다고 싸우면서도 아름다운 유년의 추억을 담았다.

우리가 사는 사택 주변에는 먹을 것을 파는 잡상인도 많았다. 엿을 가위로 톡톡 쳐서 파는 엿장수 할아버지도 있었고, 종이 상자에 찹쌀떡을 담아 놓고 파는 아주머니도 있었고, 뻥튀기 등 튀밥을 풍성하게 늘어놓고 파는 아저씨도 있었다.  

어느 날  나는 학교에서 돌아오다가 집 앞에서 만삭의 어머니를 만났다. 어머니는 쪼그리고 앉아서 아주머니가 팔고 있는 잘 익은 홍시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계셨다. 반가운 마음에 ‘엄마’하고 부르니 어머니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내 손을 끌고 집으로 서둘러 들어오셨다. 

감나무 아래서

그해 겨울 어머니는 막내 남동생을 낳으셨고 그리고 다음해  아버지께서 다니시던 회사의 사택을 비워 주면서 우리는 그 집을 나왔다. 그 후로 우리식구는 감나무 집으로 이사를 했다. 솔밭 길을 지나면 보이는 조그마한 기와집으로 우리 열 식구가 뒤 곁에 감이 주렁주렁 매달린 것처럼 함께 왔다. 

나는 유월의 감꽃 향기와 여름날의 매미소리를 들으며 시집 갈 때까지 그 집에서 살았다. 

내가 결혼 하던 해는 유달리 감이 풍년이었다. 신혼살림을 푸는데 뜻밖에 짐 속에 감이 한 자루 들어 있었다. 그 당시 나에게 감은 귤이나 사과처럼 새콤하고 달콤하지도 않은 밋밋한 과일이었다. 그래서 나무에서 딸 때는 재미있어도 거의 손을 대지는 않았다. 어머니는 당신이 맛이 있으니 그 맛있는 감을 시집가는 딸에게 먹으라고 한 자루 보내셨겠지만 그때 나는 어머니의 마음도 감의 맛도 몰랐다. 

언제나 늦가을 날씨처럼 어머니의 마음에 찬바람만 안겨드리는 내가, 신혼살림 속에 감 한 자루 담아 시집 온 후로 동생들도 한명씩 도시로 학교를 다니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육남매는 모두 감나무 집을 떠나게 되었다.
 
각자의 삶의 현장 속에서 육남매가 바쁘게 사는 동안 감나무 늘어선 사랑채 뒷밭에 할머니가 먼저 묻히셨고,  몇 년 후 할머니 옆으로 할아버지가 묻히셨고, 그리고 가지가 찢어 질 듯 야속하게도 감이 많이 열려있던  2005년 가을날, 할아버지 옆으로 아버지가 묻히셨다. 

아버지 장례를 치른 후에도 감나무집 뒤 곁엔 감이 열렸다 떨어지다 이제는 까치밥 몇 개 홍시로 남게 되어도 육남매는 아무도 가을에 시골집을 찾지 않았다.

나훈아 님의 노래처럼 울 엄니는 홍시를 무척이나 좋아하시는데도.

 

   
 

<임정훈>

예수를 구주로 믿는 사람, 딜리의 한 고등학교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음

 

임정훈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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