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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의 신앙 (마태 18:21~22)

기사승인 2016.08.23  12: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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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령강림절 열다섯번째 주일설교

*영상설교 : https://www.youtube.com/watch?v=-fEX7y37JpI

■ 주간 단상 : 만나면 좋은 친구

지난 열흘 동안 주민교회는 청소년 4명 포함 15명이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의 바인가르텐 교회를 방문하고 돌아왔다. 자세한 내용은 방문 단장인 정명채집사님이 설교 후 보고할 것이기에 한 가지만 말하고 싶다. 1994년부터 격년으로 서로 방문한지 20년이 넘었고, 우리는 이번이 여섯 번째 방문이었다. 그 동안 우리 교인들 중에는 꽤 여러 분이 다녀왔고, 여섯 달씩 청년들을 보내 머물게 하는 인턴제도도 우리는 4명을 보냈고 바인가르텐 교회에서는 청년 2명이 왔었다. 그리고 우리는 8월 23일부터 내년 2월까지 바인가르텐 교회 청년은 아니지만 독일 남자 청년 한명이 우리교회에서 머물며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배우고, 또 독일어와 영어도 가르쳐서 앞으로 한국과 독일 교회를 잇는 다리 역할을 할 것이다.

그동안 바인가르텐 교회를 방문했던 주민교우들은 그곳 이야기만 나오면 감동에 젖곤 했다. 왜 그런지 이유를 이번에 가보고 알 수 있었다. 그 교회 교인들이 우리를 영접하기 위해 준비하고 마음 쓰는 것에서 진짜 친구라는 것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말은 잘 통하지 않고 문화와 양식도 다르지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대응은 우리가 친구임을 다시 확인시켜 주었다. 대충 넘어가는 것이 별로 없고 매우 철저한 독일 사람들의 성격 상 이번 주민교회 방문객들을 맞이하기 위해 많은 준비와 수고를 했을 것이다. 전혀 서로를 알지 못했던 우리가 이렇게 친구가 되어 서로 고마워하고 기억하는 관계가 된 것은 오직 하나 우리 모두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점 때문이다. 신앙 안에서 이 교류가 계속 발전하고 또 공동의 선교 과제를 협력하여 선을 이룰 수 있기를 기도한다. 

1. 용서에 대한 두 입장 : 독일과 일본

독일은 푸른 숲과 맑은 공기와 하늘이 인상적이다. 

그리고 특이한 것은 도시나 시골이나 길거리 걷다가 도보 위에 노란 동판으로 만들어 놓은 표지판을 쉽게 볼 수 있다. 이것은 독일인들이 핍박하고 내쫓은 유대인 중 아무개가 바로 여기에 살았었다고 표시하면서 독일인들이 자신의 과오를 용서받고 잊지 말자는 뜻이 담겨있었다. 인구 30만이 넘는 큰 도시인 칼스루에뿐만 아니라 시골인 바인가르텐 길에서도 여러 개를 보았다. 자신의 역사적 과오를 박물관에다 놓고 참회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일상생활 속에서 기억하고 잊지 말자고 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일본은 똑같이 2차 대전을 일으켰고, 조선의 여성들을 군대 위안부로 끌고 가 인권을 유린하고 참혹하게 죽이는 죄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속 시원하게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일본 거리를 걸을 때마다 우리는 조선의 여성들을 전쟁 성 노예로 삼았었다고 쓴 글씨를 본다는 것, 상상할 수 있는 일일까? 

독일과 일본은 둘 다 강대국이고 능력이 있는 나라지만 자신의 과거와 죄에 대한 태도는 전혀 다르다. 이유가 무엇일까?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기독교의 힘 아닐까? 일본은 천주교와 개신교 모두 합한 기독교 인구가 0.8% 정도 밖에 안 된다. 반면 독일은 기독교가 국교이고 목회자는 정부로부터 월급을 받고, 모든 국민은 출생 신고할 때부터 종교세를 낸다. 바인가르텐 교회도 주일 출석은 100~150명 정도 되지만 실제로 목회자가 감당하는 교인은 4천명  정도나 되고, 작년 한해 장례를 60번 치렀다고 한다. 독일은 기독교 신앙이 생활의 곳곳에 깊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심으로 우리는 구원받았다는 것이다. 죄와 구원이 무엇이냐는 또 여러 가지로 논의할 수 있겠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총으로 우리가 용서 받았다는 것은 우리가 선언해야 할 복음의 근원이다. 기독교 신앙과 문화가 지배적인 독일에서는 그렇기에 참회와 용서가 일상생활 속에서 가능했을 것이다.

2. 베드로의 질문과 주님의 대답

일곱 번 정도 용서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했다가 주님을 만족시키지 못했던 베드로지만, 인생을 살수록 이 또한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절감하면서 새삼 베드로가 존경스러워진다. 사랑은 용서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라는 기독교의 본질에 가장 깊은 혜택을 받은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베드로였다. 결코 예수를 부인하지 않겠노라고 큰소리친 베드로는 주님의 재판 현장을 몰래 엿보다가 대제사장 집 여종의 날카로운 눈초리에 걸려들고 만다. 

카라바조가 1610년에 이 장면을 그렸다.

카라바조, 베드로의 부인, 94*125.5cm, 1610년, 미국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다소 나이 들어 보이게 그려진 여종이 베드로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제보를 받은 군인이 마찬가지로 손가락으로 네가 예수의 제자냐고 묻는다. 모든 손가락이 베드로를 향해 있다. 베드로의 대답, 예와 아니오에 따라서 삶과 죽음이 갈라질 수도 있다. 이 때 베드로는 대부분의 우리들처럼 본능에 따라 움직인다. “나요? 내가 예수 제자라구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나는 저런 자를 모릅니다!” 라고 하는 것 같다. 

이마에는 시름만큼이나 주름이 깊고, 그의 눈은 두려움으로 눈물이 흐르는 것 같다. 그리고 이후의 뼈아픈 후회까지 담고 있는 듯하다. 그는 세 번이나 예수를 부인함으로써 스스로 죄에 갇혔다. 

결코 신의가 밥 먹여 주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믿고 있는 이 시대는 신의와 명예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던 시대의 정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죽음 앞에서 신의와 명예를 저버린 베드로를 구원한 것은 바로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주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총이었다. 

3. 목숨 건 고백

요즘 개봉된 영화 중에 꼭 보고 싶은 것이 본 시리즈 4편 ‘제이슨 본’이다. 본 아이덴터티, 본 슈프리머시, 본 얼티메이텀의 3부작이 워낙 재미있고 완성도가 높아서 4편은 기대가 반 우려가 반이다. 7월에 개봉했는데 미국과 독일을 다녀오느라 아직 못보고 있다. 주인공 맷 데이먼은 이 영화를 20대에 시작하여 이제 40대까지 이어오고 있다. 이전 시리즈 3부작은 각각의 독특한 재미가 있지만 특별히 2부가 가장 매력적이다. 

본 시리즈가 분명 스피드와 추리, 그리고 액션을 잘 버무린 헐리우드 영화지만 007 시리즈나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 등과 구분되는 점은 단지 오락영화가 아니라 자기 성찰과 철학이 훨씬 깊다는 것이다. 

특히 2편 본 슈프리머시(우월성)가 그렇다. 

기억을 상실했다가 조금씩 찾아가는 주인공 본은 자기가 CIA 특수 훈련을 받고 첫 번째로 수행한 역할이 러시아 민주주의 정치가를 암살하는 것이었음을 기억해낸다. 그리고는 러시아로 향한다. 러시아로 가는 길에는 미국 CIA와 러시아 사업가 고용한 전문 킬러가 그를 죽이려 하고 있다. 

실제로 주인공은 영화에서 총도 맞고 영상 1 (총상)

이 영화의 장기인 아찔한 자동차 추격 장면이 이어진다. 영상 2 (추격)

주인공이 이런 험난한 과정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굳이 목숨을 걸고 러시아로 가서 무얼 하려는 것일까? 영상 3 (고백)

주인공이 이런 위험을 뻔히 예상하면서도 목숨을 걸고 러시아로 가는 이유는 딱 하나다. 

부모의 죽음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딸에게 진실을 알려주고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사과하기 위해서였다. 주인공은 이 단순한 일에 목숨을 걸었다. 용서는 그 만큼 중요한 것이다.

4. 십자가의 용서

알론소 카노(1601~1667)

개인적 내면의 신앙이든 사회적 혁명의 신앙이든, 온 세상을 용서하시는 그리스도의 대속적 십자가 은총 위에 서지 않는다면, 기독교는 곧 하나의 도덕이나 하나의 사회 개혁 프로그램에 머물고 만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거기서 질식한다. 그리스도의 용서 위에 세운 신앙만이 죄의 구조 속에 허우적거리는 우리 자신과 세상을 진정으로 구원할 수 있다. 

오늘 우리들 각자 신앙의 위기, 한국교회 위기는 밖에 있는 것보다 안에 있다. 교인 수가 줄고 문 닫는 교회가 늘어나는 것은 위기의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교인이나 교회나 지금 보다 훨씬 적었던 시대라고 위기로 표현하지 않았다. 진정한 한국교회의 위기는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총에 의해 용서받은 사람들이라는 고백이 무뎌졌다는 점이다. 우리는 정말 죄인이며 용서 받을 수 없는 존재들인데,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게 함으로써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다는 복음의 첫 걸음이 무너지고 있는 것이 위기다. 십자가를 통한 용서와 대속의 은총이 사라지면 기독교 복음은 성공 사례나 도덕적 위안의 말씀 정도로 추락하고 만다. 지금 한국교회는 이러한 현실에 부닥치고 있는 것이다. 평생 예수를 믿어도 정말 내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며 용서받은 사람이라는 뜨거운 경험이 없으면 진정한 의미의 그리스도인이라고 말 할 수 없다.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는 근거는 마음이 넓거나 교양을 갖추었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임에도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에 비하면 어떤 경우도 사소한 것에 불과한 인간 사이의 다툼과 상처는 쉽게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용서 받은 사람들이다. 그 사랑에 비하면 지금 우리를 힘겹게 하는 것은 그 무엇이든지 사소한 것에 불과하다. 100 데나리온을 용서하지 못해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총을 상실하는 우를 범하지 말자. 주님의 십자가 사랑은 우리를 고귀하게 한다. 

이훈삼 목사 (성남 주민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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