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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성된 혁명적 我라는 디딤돌에서 한 발자국

기사승인 2016.08.22  12:5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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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감기동대 - 한국 인문학과 대안교육>

“우리는 모든 배들을 불러모은다.
모든 여행자여, 집으로 돌아와
우리에게 그대들이 본 것들에 대해 말해주오.
모든 문에 달린 그 모든 자물쇠를 부수고
모든 총은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아
우리가 돌고 또 돌 수 있도록
우리가 돌리고 또 되돌릴 수 있도록”

결국 어느 역사적 사건의 의미가 해석될 수 있는 가능성은 그 또한 지극히 역사적이다.

의미-해석의 가능성은 하나의 완성된 주체 또는 전지적 의식을 지닌“나” 혹은 “나의 완성된 의식(意識)체계”로부터 오는게 아니다. 

이것은: 1) 지금의 이 글 이외에 다수로 풀어나올 수 있는 그 사건을 특정짓는 모호함과 2) 그 모호함이 부축이는 (예컨대, “일련의 사고”나 다른 역사적 현상들과는 관계없는 일련의 사건으로 단정짓는 담론들을 포함한) 여러 해석들과 3) 그 사건에 연류된 타자들의 끈임없는 (그리고 끈임없이 달리 담화되길 부축이는) 부름과 4) 사건들을 목격하고 동요되어 스스로 해석하고자 준비하는 신체들과 5) 그들 나름의 해석에서 쓰여질 (예컨대, 자신들의 신체를 포함한) 현존하는 여러 표현형식들로부터 온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필자는 한 명의 목격자이자 스스로도 –되어가는/-나아가는 존재로서 (기존에 나눠지는 관점들이나 사유적 틀들에 입각해 보기에 “오해” 또는 “오역”을 일삼는다 할 수 있는) 이 해석-작업을 통해 여러 타자들의 부름에 답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앞 연재에서도 언급되었듯, (그 또한 역사적 산물인) 어느 존재론적이고 현상학적인 태도에 입각한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그 어느 때만큼이나 정치적이다. 

이 해석의 가능성이 그것이 모두 또는 명확하게 알 수 있고 설명할 수 있는 주체의 의식에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고발하고 있고, 그렇기에 이것이 독자에게 강요될 수 없고 강요한다면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드러내기에 이 작업은 다분히 정치적인 작업이다. 

되-돌려준다는 것은. . .

삼보일배 라는 사건에 집중했을 때, 이 행위적 사건이자 사건적 행위에서 드러난 (역사적) 타자성과 여러 해석들로 풀려나올 수 있는 풍성함 또는 극함(fullness極)을 그 특정 사건과 그것에 연류된 여러 타자들에게 되돌려준다는 것은 말 그대로 “다시 돌려준다” 라는 의미에서 글을 쓰기 전에 전달받은 그 모호한 의미의 이동동선을 글을 통해 다시 한번 그려본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앞으로의 이동동선은 미리 예견될 수 없다. 그 이유는 앞서 얘기된 바와 같이, 사건들의 모호한 의미와 타자들의 부름이 그것이 나아가는 방향과 심화될 수 있는 정도에 있어 사건이 일어난 시점이나 장소나 행위자들이나 또는 그 당시 이뤄진 표현형식(예: 성인식)과 더불어 이 사건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 여러 매체들에 국한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사건에서 심화되고 (달리 또 다른 곳으로) 나아간 힘 또는 욕망 또는 정동은 스스로가 국한되는 무엇도 아니다.

되려 이 힘은 기존의 매체들(사진들, 동영상들 등)과 다른 신체들, 장소들, 조합들, 행위(자)들 등으로 이것이 달리 표현되며 나아간 바로 그 곳들(단원고 교실, 분향소, 동네 세월호 지킴이분들, 그리고 그 분들과의 모임 등)을 통로로 하여 필자와 부딪혔고 또 여러 번 그리고 매번 다르게 심화되어 왔다. 

출처 : 2014.5.3. 세계뉴스
출처 : 2015. 6. 10. sbs뉴스
2016.7.9. 용산구 문화공간 길 북콘서트

그렇게 필자를 통해 심화되고, 필자를 심화시키며 스스로가 나아가며 표현된 형식들 중 하나가 바로 이 글일 것이다. 

그렇기에 이 글에서 발화된 여러 “--이다,” “--한다,” “--했다,” “—였다” 등과 같은 표현들은 심화된 힘이 앞으로 되어가고자, 나아가고자 하는 통로들이다. 또한 이는 (앞 연재에서 말한 건너가기와 같은) 현상적인 것들을 이 글의 특정 방식을 통해 X표시하고 표시한 것을 표지될 수 있는 것으로 만들면서 그 과정을 통해 “말”(혹은 개념이) 변형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글쓰기라는 실천은 이렇듯 그것 자체의 현상적 측면을 드러낸다.
글쓰기는 이렇듯 삼보일배와 같은 사건적 행위이자 행위로 나아가는 그 무엇(something that is per or by means of forming)으로 읽혀져야 한다.  

한계를 선이 아닌 공간으로, 
그 공간은 몸으로,
그리하여 몸은 장소로, 
그 장소는 무엇이 벌-어-지-는 시간으로: 
정치적인 것이 특정 효과를 위하여 토대로 두는 특정 존재론

물론 글쓰기가 이것 또한 사건이자 행위로서 갖는 시간적 공간적 한계성과 모호성과 잠재성은 다른 여타의 행위이자 사건들과 같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중요한 차이점은 아마 지금 필자의 작업이 그것의 고유한 한계들(예컨대, 한정된 관점과 한정된 말들 그리고 글의 학술적 형식 등)을 배후에 두기 보다, 그 한계들을 “텍스트”라는 공간에 불러들여, 다른 독자들이 이를 목격할 수 있도록 한다는 데 있을 것이다. 

그것의 작업의 현상적이고도 존재론적인 측면들을 드러낸 글은 (필자를 포함한) 여러 독자들로 하여금 이것을 ‘쓰기’라는 행위이자 현상의 흔적 혹은 그 작업의 계기를 마련해 준 (“삼보일배” 와 같은) 여타 행위들이자 현상들의 흔적 이상의 무엇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곧 (독자에게 있어) 필자라는 타자와 글쓰기의 계기가 된 사건/행위들로부터 오는 다른 타자들이 독자가 글을 읽고 있는 이 현재라는 시간에 밀려들어오는 하나의 장소가 아닐까? 다시 말해, (필자도 언제금 이 글을 다시 읽으며 다시금) “독자”가 된 이가 자신 또한 타자, 즉 그 또한 달리-되어가는 정동적 존재로 머무를 수 있는 틈새이자 그것으로부터 다시 어딘가로 나아갈 수 장소가 아닐까?

그래서 특정 “글”도 극단極端적인 공간이자 장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적어도 필자로 말하자면, 그러한 글이라는 공간이자 틈새 혹은 극단에 스스로를 위치시켜 머문다는 것은 지금 어딘가 스스로 달리 되어가려 몸부림치는 여러 타자들의 부름에 힘입기를 바라는 것이자 ‘나’ 스스로도 이전의 ‘나’이외의 신체로 타자-화 될 수 있도록 (또 그러한 신체를 통해 나 또한 다른 타자들을 부르는 존재로 나아가도록) 하는 하나의 의식(儀式)을 행하는 걸 뜻한다.  

그렇다면 부르는 힘에 몸을 돌리고 여러 방식으로 그때 그때 답하는 것은‘기존의 나’라는 공간에 틈을 내는 것이자 개개인(적인 신체)으로 나눠진 여러 ‘나’들 사이/간(間)에 (혹은 그런 ‘나’들이 모여 만든 ‘우리’들 사이/간(間)에) 연대의 가능성을 실험적으로 행하는 일이 아닐까. 

“정념”에서 “지극정성”으로

“정념”이자 “정동”이라 부를 수 있는 이 힘은 사건을 목격한 ‘나’라는 존재들의 잠재성으로 울리는데, 그러한 힘에 말그대로 “힘입은” 이 글이라는 장소는 이것을 이루는 여러 개념들이 기존의 의미들로 똑같이 재생산되지 않으며 다른 무엇으로 재조합되어 나아갈 수 있는 것을 뜻한다.   

그리하여 필자는 이렇게 나아가고자 개념들을 마주하여, 이것들 또한 하나의 한계/극/혹은 극단(劇團)으로서 달리 -해석될 수 있는 과정을 거칠 수 있도록 돕고자 한다. 특히 데리다의 “타자성”혹은 “타자의 언어”라는 개념과 들뢰즈와 그 외 현대 철학자들이 개념화한 “정념”들이 역사적으로 또다른 표현 형식들로 나아가도록 말이다. 

들뢰즈의 개념이자 그 외 브라이언 마쓰미와 같은 철학자들이 개념화한 affect는 (아마도 그것의 일본어 번역 또한 참고로 하여) 한글로는 정념이라 번역되었는데, 여기서 정 자는 초코파이 포장지에도 적힌 마음 혹은 뜻 情 자를 쓴다. 그리고 정념에서의 념 자는 생각 念 자를 쓰고 있다. 

마음 혹은 뜻 정 자와 푸를 청 자가 합쳐져 만들어진 이 정 자와 더불어 생각 념 자로 구성된 “정념”을 정성이란 단어에서 쓰여지는 정 자와 성 자로 재번역/오역한다는 것은 다음을 의미한다. 

지극정성이란 표현은 흔히 부모가 자식을 대할 때 혹은 자식이 부모를 대할 때 쓰이는데, 여기서 사용된 정精은 쌀 미 자와 푸를 청 자를 합한 복합체이다. 이것을 다시금 재번역/오역하자면, 이는 쌀을 거두고, 알갱이를 걸러내고, 밥을 짓기 위해 깨끗이 준비하는 작업을 뜻한다 할 수 있다. 또한 정성에서의 성 자는 정성 誠 자이자 진실 誠 자를 쓰고 있다.

이렇듯 정념 이라는 단어와는 달리 정성이란 단어는, “힘”이란 개념을, 읽는 이로 하여금 신체가 신체를 향해 쏟는 힘이자 정해진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정할 정) 무던히 고르고 거르고 물결을 내어 만들어나가는 의미로 읽을 수 있도록 이끈다. 

또한 정성이란 단어는 시간적이며 공간적이고 살-적인 측면을 증류시키지 않으면서, 즉 추상화하지 않으면서, 하나의 신체에서 또 다른 신체로 나아가는 그 힘이 어느 진실로 가득한 장소이자 몸짓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암시한다. 물론 그 진실이란 해석하고 해석해도 깔끔해질 수 없는 모호성을 띤다. 

한편으로는, 사회적 요인들을 모두 설명한다 해도, 왜 그 자리에서 그 시간에 내가 사랑하는 이가 죽어야만 했는지, 왜 그의 죽음은 고통스러워야 했는지 풀리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왜 죽음이 삶의 끝자락에 자리하고 있는지, 그리고 왜 죽음은 소리 소문 없이 그렇게 갑작스럽게 오는지 등의 문제들은 앞으로도 무던히 말들로 그리고 다른 표현들로 풀려나올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 진실 성誠이 띤 모호함에는 정성 精 자에도 담겨있는 바로 청렴(youthfulness)이 자리하고 있으며, 그 청렴은 다름아닌 진실(특히 그것의 사회적이고도 현-역사적인 측면들)을 밝히기 위해 성인이 성인식을 통해 다시금 스스로를 푸르게 하는 힘이자 (씨앗을 뿌리고, 벼를 추스려, 쌀을 걸러내며 타인과 스스로에게 밥심을 나누는) 신체가 또다른 신체로 나아가는 힘이며 그러한 신체들이 다른 타자(他者/多子)의 부름에 답하여 만들 새로운 연대와 배치의 가능성이다. 

그렇기에 이러한 정성이 쏟기고 가득한 곳은 현재라는 항만과 다르지 않다. 
머물려는 존재와 달리 되려 나아가는 존재 사이의 항만抗灣.
달리-되려 나아가는 존재를 희생하며 한 곳에 머물려는 힘과 달리 되어 나아가는 존재를 위해 한 곳에 머물 수 밖에 없는 힘 사이의 항만抗灣.
타-존재를 희생하면서 스스로의 잠재성 또한 희생하는 힘과 타-존재가 나아가도록 이전의 스스로를 희생하며 새로이 나아가는 힘 사이의 항만抗灣.  

역사적 개념이자 정치적 신체가 몸소 재현하는 “힘”의 또다른 이름인 ‘정념’은 그러므로 틈새로 세어나가고, 틈새에서 새로이 나아가며, 틈새로서 풍부하게 넘쳐난다. 현재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가 어떠한 형식을 통해 타자들과 내 안의 청렴에 답하며 표현하고 스스로를 특이하게 생성하도록 한다. 

이런 푸르른 힘을 가리키기에 정념은 또다시 심화되어 살과 피와 시간과 공간과 장소가 없는 “한계성,” “정념情念” “타자성”에서 살과 살이 부대끼고, 피가 끓고, 시간들과 기억들이 겹쳐지며, 또 다른 만남의 장소를 일으키는 “지극정성至極精誠”이란 개념으로 나아간다.

그렇다면 우리는 교육이라 범주화된 장에서 보여지는 항만에서 어떻게 하면 새로운 개념화와 다양한 사유와 실험적 –되기를 실천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청년들이 자신들의 창의적 힘을 절제하며 표현하면서도 그것을 함부로 통제하지 않으며 다양하게 심화시킴으로써 새로운 정치적 신체들로 나아갈 수 있을 까? 

이러한 과정의 가능성은 분명 나라를 위하여 그리고 그 나라의 경제를 위하여 균일화되고 평균화된 “직업노선”을 밟도록 강요하며 떠오를 수 없을 것이다. 그 강요된 삶의 노선을 구조조정 등을 통해 제도화시키며, 청년들로 하여금 기업들과 그 기업 대표자들의 입장을 우선시 하는 정부가 정의내리는 “인구” 중 한 조각으로 살게 하는 사회적 바탕에는 그러한 가능성이 피패해질 것이다. 그러다 그렇게 성인이 된 청년들이 정부나 고용자들의 관점에서 얼핏보아 더 이상 이윤이 남지 않아 폐기처분해도 상관없는 사회에서는 그러한 가능성이 더더욱 희박해 질 것이다. 

그렇기에 청년들의 –되기가 다채롭게 실험되어 지려면, 그들의 목소리가 성인들의 목소리 만큼이나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고 존중되어져야 하며, 성인들이라 분류되는 이들이 기존의 자기표현의 양식들을 용감하게 포기하며 새로이 나아갈 준비를 해야할 것이다. 

힘의 중심이 고정되고 그것의 위계적 조직이 고정된 채, 그 조직에 걸맞는 주체로 청년들을 가두지 않는 것. 정해진 직업선 앞에 줄지어 놓고 정해진 행복관으로 무장시킨 채 창조경제의 전쟁터에 그들을 내놓지 않는 것. 대체불가능한 이들이 각자 달리 될 수 있는 동등함을 과히 “평균화”와 “평준화”로 오역하지 않는 것. “독재”가 아니라서 아무도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듯한 “경제난”을 빌미로 청렴한 이들의 재해석과 삶의 양식들을 한정시키지 않는 것. 그래서 다양한 삶의 미학의 또다른 이름인 예술과 인문학 등의 표현 형식들을 창조경제의 상품으로 변질시키지 않는 것. 이러한 노력이 대안교육실천에 필수적인 조건이어야 하지 않을 까.  

나(아)-가-는-時-에-선-書

現자의 時 
순순히 가지 마라 저 아늑한 밤 안으로, 
노년은 낮의 끝에서 타오르며 사납게 분해야 한다;
일어라, 일어라 그 빛의 사그라짐에 맞서.

슬기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신들의 마지막 순간에 어둠이 옳다는 것을 안다, 
그들의 말은 그 어떤 번개도 굽혀 내본 적이 없었기에 그들은
순순히 가지 않는다 저 아늑한 밤 안으로.

착한 이들아, 마지막 물결에 서서 마지막 물결이 되어, 얼마나 밝게
그들의 미미한 소행들이 초록빛 항만抗灣에서 춤출 수 있었을 지를 울부짖으며,
일어라, 일어라 그 빛의 사그라짐에 맞서. 

거침없는 이들, 저 도망치는 태양을 잡고 노래한 자들,
그리고 깨닫는 이들, 자신들이 너무나 늦게서야 태양이 떠나는 길에 이를 비통해 했음을,
순순히 가지 마라 저 아늑한 밤 안으로.

무던히 무덤처럼 진지한 이들, 죽음의 가까이에서, 눈먼 시야로 본다        
먼 눈은 혜성처럼 이글거리고 명쾌할 수 있음을,
일어라, 일어라 그 빛의 사그라짐에 맞서.

그리고 당신, 저 슬픈 고도에 계신, 나의 아버지, 
지금의 나 당신의 격렬한 눈물과 함께, 저주하고, 축복하며, 나 기도한다.
순순히 가지 마라 저 아늑한 밤 안으로.
일어라, 일어라 그 빛의 사그라짐에 맞서.

순순히 가지 마라 저 아늑한 밤 안으로

<딜런 토마스>

나가며
나 가며 
나[아]가며
나-ㄱㅏ-며 
나 누 며 
ㄴㅏ-가며 
노[아]가며
노-ㄱㅏ-며 
노 고[꼬]며
노-ㄱㅗ-며
노ㅎ며

<필자 소개>

 

필자 송혼

민주적 주체화 과정에서 떠오르는 교육, 지식전수, 그리고 저자되기(becoming an author)에 관한 문제들에 대해 연구하는 중이다. 그 중 저자(authorship)라는 문제와 연결해 부정적으로 여겨진 권력(authority)실천에 대해 다시 성찰하는 중이다. 현재 미국 프린스턴대 박사과정에 있다.

송혼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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