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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선(善)을 따라 가기

기사승인 2016.08.19  13: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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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소한 남자의 소소한 독서>

고등학교 윤리시간을 기억하려고 애써봤다. 당황스럽게도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다. 수학시간을 떠올리면 정신 차리려 해도 칠판을 채워가는 풀이가 가져다주는 지난함에 쉽게 혼미해지던 기억이 있다. 영어시간의 경우 일어나서 지문을 읽게 시킬까봐 오늘의 날짜가 내 번호랑 같은지 확인하고 주번인 그 주에는 아예 체념했던 기억도 난다. 그리고 체육시간의 해방감까지 생생한데 윤리시간에 대한 기억은 도통나지 않았다. 내가 공부를 안해서인가 돌아봤지만 윤리과목의 성적을 보면 그렇지도 않다.(물론 시험성적이 공부를 했는지에 대한 정확한 평가기준일 수 없다.) 그런데 윤리시간이 어땠는지도 기억나지 않고, 심지어 무엇을 배웠는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윤리과목 시험공부는 벼락치기로 준비해 시험지에 기가 막히게 잘 쏟아냈었고 꽤 괜찮은 내신 성적을 받았었다. 그리고 다 쏟아낸 탓인지 이젠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 나에게 ‘윤리적 인간의 탄생’이란 부제의 ‘호모 에티쿠스(Homo Ethicus)’는 꼭 만났어야 하는 책이었다. 이 책은 서양윤리학을 훑어 내린다. 소피스트들과 소크라테스로부터 시작하여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 학파, 에피쿠로스 학파, 아우구스티누스, 스피노자, 흄으로 이어지고 마지막 90쪽 분량은 칸트로 채워지게 된다.

저자 김상봉 교수는 서문에서 저작 의도를 말한다. “낡은 것 속에서 새것을 길어내기 위해 그리고 타자 속에서 나를 다시 발견하기 위해 소크라테스부터 칸트에 이르기까지 서양 정신이 추구해온 윤리적 삶의 이상을 오늘 우리의 자리에서 반추해본 기록이다.” 그가 말했듯 이 책은 여러 철학자의 사상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우리의 역사를 반추한다. 저자는 허투루 넘어가는 일 없이 일제 식민지 시대, 6·25전쟁, 박정희, 1980년의 광주 그리고 IMF정국까지 우리 근현대사의 골짜기들을 윤리적 측면에서 집어 본다. 이런 서술은 독자의 피를 달구고, 뒤통수를 후려 맞은 것 같은 강렬함으로 다가온다. 왜냐하면 우리 민족이 겪은 피와 살의 역사를 돌아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철학자인 저자가 인용한 신약성서의 구절엔 이 책에 담아내려는 저자의 의도가 함축되어 있다.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예배소서5:9) 이에 따르면 저자에게 있어서 윤리학이란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는 길로 보인다. 그리고 그는 우리사회의 구성원들이 빛의 자녀들이 되길 바라는 마음을 여기에 담아낸다. 이는 저자가 서양 윤리학의 계보를 집어가다가 칸트에 이르러 자신이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를 드러내는 지점에서 확인된다. 그는 칸트가 말하는 ‘선한의지’에 대한 성찰을 통해 우리사회 구성원들이 빛의 자녀들로서 살아가길 촉구한다.

그렇다면 저자는 왜 우리사회의 구성원들이 빛의 자녀들 즉 윤리적 인간(Homo Ethicus)이 되길 원할까? 저자는 우리 근현대사가 남긴 상처들을 치유할 방법으로서 윤리적 인간들의 탄생을 기다리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우리가 지나온 근 백년의 시간을 통해 맞이한 현실이 “이익”에 대한 집착이라고 말한다. 돈과 권력에 또는 그 모든 것들이 가져다주는 쾌락에 대한 집착 말이다. 그는 이 집착이 우리사회가 윤리, 도덕, 선 그리고 공동체에 대해 사유하지도 행동하지도 못하게 만든다고 진단한다. 때문에 그는 ‘우리가 왜 이렇게 됐을까?’ 라는 물음을 붙잡고 글을 시작한다. 철학자와 철학사상의 각 단원들 마다 이 질문을 놓지 않고 있으며 이에 대한 답을 찾는 시도를 이어간다. 

저자가 문제의식을 가지고 바라보는 우리 근현대사에서 발견되는 상처들이란 우리의 지난 근 백년의 역사가 고통의 역사라는 표현이다. 고통이란 때때로 인간을 깊게 만들기도 하지만 때로는 인간을 메마르고 이기적이 되게 만들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런 이유가 “우리사회에 만연한 천박한 이기심을 설명할 순 있어도 정당화시킬 수 없음”을 저자는 분명히 말한다.

그에 따르면 “고통 앞에서 인간이 깊어지느냐 아니면 천박하고 이기적이 되느냐는 고통 그 자체에 달려 있기보다는 우리들 자신에게 달려 있는 일이다.” 여기서 우리 자신에게 달려있다는 말은 결국 칸트가 말하는 선한의지의 발현과 연결된다. 그리고 이 말은 결국 인간은 고통 속에서만 “참된 선”을 검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지난 역사는 너무나도 큰 고통의 역사였기 때문에 우리에게 ‘선’이란 무엇인지 확인 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아쉽게도 그 속에서 발견된 우리의 모습은 자연법칙인 “약육강식”에 가까운 사회상과 천박할 정도로 자신에게만 집착하는 이기적 모습이다. 이는 곧 극심한 경쟁만이 있음을 뜻하며, 동시에 ‘선’이라는 낭만에게는 허락될 자리는 없음을 뜻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선 ‘그럼 왜 선하게 살아야하는가?’라고 누군가 질문할 경우 합당한 답을 내놓기 힘들다. 약육강식의 자연세계 안에서 선하게 살아야 할 합당한 이유는 없다. 그것은 도태 또는 죽음과 동의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현실에서도 선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저자가 윤동주 시인의 글을 인용하듯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에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저자는 바로 이런 사람들을 위해 자신이 말하고 있음을 밝힌다. 칸트가 말하듯 “추수에 대한 희망 없이 선의 씨앗을 뿌리는 사람들, 보상에 대한 기대 없이 세계에 대한 의무를 다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이들이 빛의 자녀들이고 이들을 통해 인간의 역사는 멸망하지 않고 지속된다는 것이다. 

칸트

때문에 저자는 삶에 대한 윤리적 반성이 두드러지게 결여된 우리사회를 보면서 ‘선이란 무엇인가?’라는 윤리적 물음을 통해 우리의 양심을 다시 밝히고자 한다. 먼저 고대 그리스의 선은 탁월함을 뜻했고, 개인의 욕망이 실현되는 것이기도 했다. 칸트에 이르기 전까지 ‘선’이란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선’과는 매우 다르다. 칸트 이전의 ‘선’은 오히려 약육강식에 잘 어울리는 개념이다. 칸트를 통해서 ‘선’이란 순수한 도덕적 현상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다. 칸트는 막연한 의미의 좋음이 아니라, 도덕적 강제의 본질적 의미를 물음으로써 순수한 윤리학의 창시자가 되었다.1)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칸트 이후를 살아가는 우리는 ‘막시밀리안 콜베(Saint Maksymilian Maria Kolbe)’2)의 경우나 ‘선한 사마리아인’을 놓고 ‘선’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그러나 ‘선’에 대해서 고민할 때 우리는 ‘선’의 무기력함을 발견하게 된다. 이를 예수의 생애에서 볼 수 있다. 예수가 추구한 ‘선’ 결과는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를 보면 독립운동을 한 집안이 3대가 망하고, 친일했던 집안이 3대가 흥하는 모습에서 ‘선’은 곧 무능력으로 증명된다. 이에 대한 가장 큰 예는 일본군 장교로 독립군 토벌에 기여했던 박정희가 해방된 우리나라의 대통령이 되는 일 그리고 그의 딸이 다시 대통령이 되는 일이 가능한 현실일 것이다.

이런 모습은 우리나라에 선과 악 그리고 의로움과 불의함의 가치관이 왜곡되어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런 현실 탓에 선과 정의가 헛되고 부질없는 일로 여겨진다. 그저 내 한 몸 하나 보전하자는 것이 정의가 되어간다. 이런 모습은 도덕적 허무주의에 빠진 모습일 것이다. 바로 이런 우리사회를 치유할 방법으로 저자는 ‘선’에 대한 질문과 성찰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선’이란 본디 자연세계를 초월하여 인간의 내면에서 ‘선한의지’로 발현되지만, 동시에 자연법칙에 적용받는 물질세계에서 한 없이 무기력해지기도 하는 특징 때문에 쓸모없는 것으로 취급 받기 십상이다. 그에 대한 흔한 증거는 인터넷상에서 쉽게 확인된다. 인터넷상에서 보면 ‘선’하고자 하는 시도나 발언들에 대해서 ‘선비 짓 하지 말라’ 라든가, ‘너만 깨끗하냐?’ 또는 ‘씹선비’3) 나 ‘진지충’4)같은 말로 비아냥거리는 경우가 잦다.

이런 풍조가 만연하다고 해서 만약 ‘선’에 대한 고민 없이 자연법칙을 따라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사회에 살아남기에만 골몰하며 살아가면 되는 것일까? 그래서 ‘선’하고자 하는 것 시도들이 ‘사치’와 ‘선비질’5)로 매도된다면 사자가 토끼를 잡아먹는 것이 당연하듯이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그리고 권력자가 소시민들을 억압하는 것은 비난받을 일이 아닐 것이다. 이 논리라면 우리나라를 침략한 일본과 1980년 광주시민을 학살한 전두환에 대해서도 합당한 일로 평가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는 안 된다. 때문에 우리사회가 가진 왜곡된 도덕과 윤리관이 우리사회의 상처를 아물지 못하게 하고 있는 현실 앞에서 우리에게 시급히 필요한 것은 저자의 말처럼 ‘선’에 대한 고민과 성찰이다. 

우리사회가 겪어온 고통의 역사는 적자생존과 각자도생의 방식을 선호하는 사회를 만들었다. 그렇게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고, 그렇게 해야만 성공할 수 있는 사회가 되었다. 이처럼 우리사회의 현실은 생각하면 할수록 너무나 거대한 문제이자, 쉽사리 답이 보이지 않는 문제를 떠안고 있다. 저자는 이런 우리사회에서 ‘선’에 대해 고민하고 행동하는 하는 사람들에게 말을 건다. 그는 ‘호모 에티쿠스’들에게 당신들이 희망이라고 말한다.

이제 나는 ‘호모 에티쿠스’인가 자문해 본다. 내가 ‘호모 에티쿠스’인지 스스로 답하긴 뭐하지만, 분명한 것은 나는 윤리적 인간이고 싶다는 것이다. ‘선’을 추구하는 삶을 살고 싶다. 그런 나에게 ‘선’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관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보인 것이 나에겐 ‘선’ 그 자체이다. 예수가 제시한 선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에6) 함축되어 있다. 그것이 그리스도교적 ‘선’이라고 생각한다. 자신 또한 똑같이 강도당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죽어가는 강도만난 사람, 생면부지의 사람을 보고 측은한 마음을 느끼는 것은 칸트가 말한 ‘선한의지’의 발현이다. 이때 ‘선한의지’가 생긴다 하더라도 행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분명 힘들다. 그러나 예수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측은한 마음을 행동으로 옮긴 것을 ‘선’이라고 말한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교가 추구해야 할 ‘선’인 것이다. 

자연법칙의 지배 아래 있는 인간은 ‘자기보존’이라는 본능이 앞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한의지’, 누가복음서의 표현으로 ‘측은한 마음’이 발현되고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분명 초월적이다. 이것은 강제적이 않으며, 통제받지도 않고 자발적으로 생겨나는 현상으로서 순수한 목적으로서의 ‘선’이라 할 수 있다. 예수는 자신의 이웃이 누구냐고 묻던 이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리고 생면부지의 죽어가는 사람이 너의 이웃이고, 그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한다. 게다가 예수는 말만하는 인물이 아니다. 성서에 따르면 예수는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죽어가는 사람들 위해 육화되어 세상에 왔다. 

따라서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는 예수 자신이 곧 선한 사마리아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행한 ‘선’을 너희도 행하라는 이야기이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는 해피엔딩이지만, 예수는 강도 같은 사람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분명 자연세계에서는 죽음으로 귀결된 예수의 ‘선’이 무기력하게 보이지만, 그런 예수를 승리자라고 하는 고백하는 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이다. 인터넷 용어론 이것을 ‘정신승리’7)라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앙을 고백하는 나에겐 이 ‘정신승리’가 내가 추구해야 할 ‘선’이다. 예수가 보여주는 ‘선’은 결코 녹록치 않다. 칸트도 이 세계에 최고선(하늘나라를 건설하는 것)을 이루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을 추구해야 한다는 그의 말에는 ‘선’의 순수성을 향한 그의 마음이 드러난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가 추구한 ‘선’에 대한 입장과 상통한다. 

나는 얼마나 예수의 ‘선’을 쫓는 ‘호모 에티쿠스’가 되길 원하는지 다시 고민해 본다. 그리고 한국 교회는 얼마나 예수의 ‘선’을 따르고자 하는가 생각해 본다. 부디 나와 내가 몸담은 한국 교회가 예수의 가치관을 절대 ‘선’으로 추구하는 ‘호모 에티쿠스’적 집단이 되길 빌어본다. 이 ‘정신승리’의 길을 걷고자 할 때 칸트가 주는 위로의 경구가 있다. 저자가 옮긴 칸트의 말로 글을 마친다.

“참으로 선하게 살기 위해 우리는 추수에 대한 희망 없이 선의 씨앗을 뿌리는 법을, 희망 없이 인간을 사랑하는 법을, 그리고 보상에 대한 기대 없이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다하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그런 비극적 세계관 속에서도 언제나 기뻐하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8)

<각주 설명>

1) 김상봉 지음, 『호모 에티쿠스』(한길사, 2002), 251쪽.
2) 1939년 나치에 반대한 혐의로 비밀경찰에 체포되었다가 일단 석방된 뒤, 1941년 2월 유대인들과 폴란드 지하조직을 도왔다는 죄목으로 다시 체포당했다. 바르샤바 감옥에 갇힌 뒤 배에 실려 아우슈비츠로 끌려갔고, 이곳에서 사형판결을 받은 죄수 프란치셰크 가요프니체크를 대신하여 목숨을 내놓았는데, 처음에는 굶주리다가 마지막에 페놀 주사를 맞고 죽었으며 화장되었다.(다음 백과사전)
3) ‘일베’용어다. ‘일베’ 사용자가 보기에 지나치게 예의를 차리며, 인터넷상에서 존댓말을 하고 진지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 등을 비하하고자 시작되었다.(글쓴이 주)
4) 인터넷 용어다. 농담으로 한 얘기에 쓸데없이 진지하게 반응해서 재미를 반감시키는 사람이란 뜻과 벌레를 의미하는 한자어 충을 결합되어 비하를 목적으로 사용된다.(글쓴이 주)
5) 인터넷 용어다. 따분하고 고지식하며, 남에게 괜한 잔소리를 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상대를 훈계하고 가르치려 드는 사람을 비꼬는 말이다.(글쓴이 주) 
6) 누가복음서 10:25-37
7) 정신승리는 인터넷 용어다. 하지만 그 출처는 공산주의 리얼리즘 작가 루쉰의 저작 “아큐정전(阿Q正傳)”에서 유래한다. “아큐정전”의 주인공 ‘아큐’는 동네 깡패들에게 얻어맞고는 “나는 아들한테 맞은 격이다. 아들뻘 되는 녀석과는 싸울 필요가 없으니, 나는 정신적으로 패배하지 않은 것이다”는 식으로 자위하면서, 자기보다 힘없는 아이에게는 힘을 행사하고 홧김에는 비구니를 겁탈하려 한다. 루쉰은 이러한 근성을 아큐의 ‘정신적 승리법’으로 표현했다.(한국 위키백과, 정신승리법)
8) 김상봉 지음, 『호모 에티쿠스』(한길사, 2002), 334-5쪽.

 

<필자 소개>

 

정주현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졸업

예사랑교회 청소년부 전도사

아쉽게도 평범한 통찰력과 이해력을 가졌지만, 제 능력 이상의 성취를 원하는 욕심이 있다. 게다가 어렴풋이 느끼는 이상향, 옳은 삶, 행복한 삶에 대한 갈증 때문에 더듬거리며 갈 길을 찾으며 살고 있다. 그런 탓에 배움의 성취도 더디고, 삶의 여정도 매끈하지 않다. 그러나 다행이도 스트레스는 많이 받지 않아서 소박한 하루하루를 감사한 마음으로 살고 있다. 

이 지면은 카페에서 지인들과 읽은 책에 대해 수다 떠는 느낌으로 채우고자 한다.

정주현(예사랑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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