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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의 비극 : <덕혜옹주>

기사승인 2016.08.05  12:0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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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한수의 공감팩션>

많은 이들이 지금 이 나라가 처한 상황이 구한말의 위기 상황과 똑같다고 걱정을 합니다. 대한제국 시대는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이리 저리 휘둘리면서 왕가는 풍비박산이 나고 백성들은 각자도생하는 비참한 꼴인데 허황된 ‘대한제국 황제폐하’가 다 무슨 소용인지 한심하기 짝이 없던 시대였습니다. 지금 이 시대는 어떻습니까. 민족정기를 더럽혀도 유분수지 이 나라의 지도자라는 자가 어떻게 국모를 끔찍하게 살해한 일본 낭인의 이름(오카모토 미노루)을 그대로 따와 창씨개명을 했단 말이냐, 풍설이 자자한 걸 보면서 참담한 심정에 빠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디에서부터 첫 단추가 잘못 꿰어진 것일까요.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과거를 보는 게 아니라 현재를 제대로 보기 위해 역사를 돌아본다는 뜻일 겁니다. 한국전쟁 이야기 [태극기 휘날리며]는 지금 우리 사회가 앓고 있는 이념 대립의 병통을 지적하고 있으며 일제 강점기 아나키스트 이야기 [암살]은 청산되지 못한 친일 반민족의 수치를 꼬집은 것으로 읽힙니다. 이제 막 개봉하게 된 [덕혜옹주]는 이 시대의 어떤 고민을 말하고 있을까요. 

영화 <덕혜옹주>

최근에 영화 [암살]과 [동주]로 1930년대 암담한 조선의 현실을 들여다볼 수 있었는데 이제 좀 더 거슬러 올라가 대한제국 시대로 가볼 수 있는 작품이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참 반가웠습니다.  [불꽃처럼 나비처럼], [가비]에 이어 신작 [덕혜옹주]가 보태어짐으로써 구한말, 국권을 상실한 황실의 비극을 보다 더 입체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작품은 지금 우리가 이 시대에 대해 어떤 걱정을 하고 있는지 잘 드러내고 있으며 참다운 역사관은 어떠해야 하는지 철학적인 고민까지 하게 만듭니다.

영화 [덕혜옹주]는 원작이라고 할 수 있는 소설 [덕혜옹주]가 나올 때부터 말이 많았습니다. 역사 서술의 진실성에 대해 고민을 하게 만드는 작품입니다. 권비영의 소설 [덕혜옹주]는 2015년에 나와 지금까지 100만 부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 작품입니다. 그런데 이 작품보다 훨씬 먼저 일본인 ‘혼마 야스코’가 [덕혜희]라는 평전을 낸 적이 있습니다. 작가 권비영도 후기에서 [덕혜희]를 많이 참고했다고 언급했는데 참고 수준이 아니라 거의 표절이라는 시비가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소설 <덕혜옹주>

영화 [덕혜옹주]는 1919년 아버지 고종의 독살과 1926년 덕혜옹주의 일본 유학 이후를 배경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습니다. 고종은 많은 자식을 낳았지만 3남 1녀만 장성했는데. 맏이가 순종, 둘째가 의친왕, 셋째가 영친왕이고 막내딸이 덕혜옹주입니다. 막내 덕혜옹주는 첫째 둘째 오빠와는 40살 가까이 나이 차이가 나고 바로 위 오빠 영친왕과는 열다섯 살 차이가 납니다. 덕혜옹주가 태어나던 해가 1912년이니 고종이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해서, 을사늑약(1905년)이 일제의 강압에 의한 것임을 만국에 알리려고 한 것을 빌미로 폐위(1907년)당하고 실의에 빠져 있을 때입니다. 이 때 얻은 늦둥이 딸은 유일한 기쁨이었습니다.  

늦둥이 딸을 그렇게 예뻐하던 고종은 덕혜옹주가 여덟 살 되던 해에 독살 당했다고 합니다. 영화에서는 아버지 고종이 독약을 탄 식혜를 마시고 쓰러지는 장면을 어린 딸 덕혜옹주가 직접 목격하는 것으로 그리고 있는데 그 어린 아이가 얼마나 충격이 심했겠습니까. 옹주는 평생 자기도 독살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 살았다고 합니다. 음료수 통을 항상 들고 다니는 편집증을 보이다가 나중에는 심한 정신병에 걸리고 맙니다. 

덕혜옹주 회갑연(왼쪽 이방자, 오른쪽 덕혜옹주)

고종 3년상이 끝나자 옹주는 일본으로 끌려갑니다. 고종이 폐위될 때(1907년) 일본으로 먼저 끌려가 있던 셋째 오빠 영친왕이 맞아 주었지만 지옥으로 끌려들어간 기분이었을 겁니다.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사연도 참 기구합니다. 명성황후가 낳은 적자 순종이 성불구자라 아이를 낳지 못하니 둘째 의친왕이 왕위를 물려받아야 하는데 의친왕은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고 일제가 한사코 반대를 하니 셋째 영친왕이 황태자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순종의 뒤를 잇게 될 영친왕을 일본으로 끌고 가 일본 왕족 여인과 강제 결혼을 시킵니다. 그 황태자비가 바로 이방자 여사입니다.  

본명 ‘나시모토 마사코(方子)’ 이방자 여사는 메이지 천황의 조카손녀이자, 전범 히로히토 천황과 혼담이 오갔던 일본 황실의 공주입니다. 일제가 강압적으로 영친왕을 황태자로 앉히고 결혼도 저희 마음대로 결정하는 등 우리 왕가를 욕보이는 짓을 서슴지 않았으니 일제 천황가와의 혼담은 조선 민중의 분노를 사게 되고 아버지가 의문사를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강제 결혼을 거역하지 못한 영친왕은 백성들의 비난을 받습니다. 나중에 조선 이씨 왕가 집안에서도 혈통 문제로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수년 전, 의친왕의 후손들이 영친왕 후손들의 왕가 종친회(회장 영친왕 아들 이구)를 비판하면서 논란이 불거진 적이 있습니다. 영친왕은 일본 왕족 이방자 여사와 결혼했으니 그 후손은 순수 조선 혈통이라고 할 수 없는데 종묘제례에 어떻게 일본 왕족이 제사를 주관(술잔을 올리는 아헌관)을 할 수 있느냐고 항의를 했습니다. 잘 알다시피 의친왕은 상해 임정 망명 기도로 일제로부터 강압을 받아 황태자 책봉에서 밀려나고 동생 영친왕이 황태자로 책봉되었으니 의친왕의 후손들은 황실의 계보가 영친왕으로 이어진 건 민족정기 훼손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방자와 영친왕 사이에 태어난 맏아들 ‘이구’ 씨는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걸 수치스러워 했다는데 한국 정부는 그를 조선 왕가의 정통으로 받들고 옥체도 왕릉으로 모셨으며, 일제의 강압으로 태자비가 된 이방자 여사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여러 훈장(대한민국국민훈장모란장, 5ㆍ16민족상,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는 등 영예로운 생애를 살았다고 하니 종친회에서 분란이 일어날 만도 합니다. 

영친왕과 덕혜옹주가 말년에 처참해진 모습을 보면 일제의 만행에 분노가 치밀어 오를 수밖에 없습니다. 덕혜옹주는 정신병원에서 수십 년을 갇혀 지냈으며 영친왕은 말년에 실어증에 걸려 병상에서 7년간이나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습니다. 일본에 볼모로 잡혀갔던 영친왕과 덕혜옹주가 도대체 어떤 대접을 받았기에 이렇게 정신이 황폐해졌을까요.

병원 입원중인 영친왕을 돌보는 마사코(방자)

덕혜옹주가 일본에서 대마도 귀족 출신 ‘소 다케유키’와 강제로 결혼하게 되고 정신적으로 온전치 못했으며 둘 사이에 태어난 딸 정혜가 엄마와의 갈등이 심해 결국 가출하여 행방불명되는 등 그 아픈 사연은 ‘혼마 야스코’의 평전 [덕혜희]에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소설 [덕혜옹주]가 남편 ‘다케유키’를 인정이 많아 아픈 덕혜옹주를 잘 보살핀 것으로 그린 건 ‘혼마 야스코’가 쓴 평전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소설에 등장하는 수행 나인 ‘복순이’는 실존인물이 아닌데 작가는 일본에서 덕혜옹주를 잘 돌봐준 영친왕비 이방자 여사를 바탕으로 그렸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남편 ‘다케유키’가 정신이 온전치 못한 부인 덕혜옹주를 정성껏 돌봐주는 것으로 그리고, 부인 ‘마사코’ 이방자 여사가 볼모로 잡혀와 늘 우울한 남편 영친왕을 극진히 모시는 것으로 그린 점에 대해서는 심사가 뒤틀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선진화된 일본이 곧 망할 조선을 구제해 줬다는 식민지근대화론이 떠올랐습니다.

복순이와 함께 음모하여 덕혜옹주를 탈출시키려고 애쓴 영화 속 등장인물 ‘김장한’은 실존인물이긴 하지만 그가 벌인 망명 거사는 사실이 아닙니다. 이 인물은 고종이 자기 딸을 일제에 빼앗기지 않기 위해 미리 결혼시키려고 사윗감으로 점찍어 뒀던 ‘김장한’과 그의 형 ‘김을한’을 바탕으로 꾸며냈다고 봐야 합니다. ‘김을한’은 큰아버지가 고종황제를 곁에서 보필한 시종이었고 그의 아내는 덕혜옹주의 유치원 동무였으니 황가의 사정을 잘 아는 사람입니다. 

김을한은 실제로 서울신문 일본 주재 기자로 있을 때 덕혜옹주를 정신병원에서 구해내어 귀국시키려고 물심양면으로 애쓴 사람이긴 한데 영화에서는 덕혜옹주를 망명시키기 위해 무력 투쟁하는 독립투사로 그리고 있어 좀 과장이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을한’이 쓴 책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은 [덕혜옹주]가 황가의 내부 사정을 디테일하게 그려내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영화 [덕혜옹주]가 소설 [덕혜옹주]와 달리, 영친왕과 덕혜옹주를 망명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김장한’을 독립투사로 그린 것을 역사 왜곡이라고 봐야 할까요? 심약한 영친왕과 덕혜옹주를 평생 돌본 ‘마사코(方子)’는 일제가 조선을 집어삼키며 내세운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상징하는 듯해 영 불편하긴 합니다. 대한제국 황실의 종말은 들여다보기가 거북할 정도로 비참하기 그지없는데 이 불편한 심기를 무마하기 위해 있지도 않은 일을 꾸며내도 되는 것일까요. 대한제국은 만백성의 손가락질을 받아야 할 만큼 치욕스러운 역사일까요.  

영친왕과 덕혜옹주가 조국 독립에 이바지하기 위해 망명할 결의가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영화의 망명 기도 이야기가 근거가 전혀 없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고종과 의친왕이 임시정부로의 망명을 기획하고 실행에 옮겼다는 사실이 명확히 밝혀져 있습니다. 그러니 영화 [덕혜옹주]는 영친왕과 덕혜옹주가 일제의 볼모로 받은 고통과 의친왕의 조국 독립 투쟁 의지를 합쳐 재구성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독립투사들과 교우한 의친왕(앞줄 중앙, 바로 뒤 김규식)

의친왕은 미국에서 공부할 때 안창호 김규진 등과 교분이 있었고 그들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대는 등 독립 투쟁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했으며 의암 손병희하고도 친분이 두터워 전국을 다니며 의병 봉기를 독려하기도 했습니다. 3.1운동을 배후에서 지도하면서 일본 경찰의 삼엄한 감시를 받았으며 3.1운동 이후 상해임시정부로 망명하기 위해 중국으로 잠입하다가 일경에 체포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의친왕의 독립 투쟁은 박종윤의 소설 [의친왕 이강]으로 잘 그려졌는데 영화 [덕혜옹주]에는 이 작품도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우리 민족의 삶이 참으로 파란만장하여 그 구석구석을 모두 담아내는 팩션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합니다. 대하소설로도 그 스펙트럼을 감당할 수 없을 겁니다. 궁궐 비사에 초점을 맞추다 보면 복벽주의로 오해를 살 수도 있겠지요. 그러니 이 시대를 그린 어떤 작품이라도 만족스러운 빛을 구현하기 힘들 겁니다. 앞으로 이 시대의 전형(典型)을 뽑아내기 위한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해 보입니다. 

의친왕은 ‘망명 정부가 수립되면 황족으로서의 예우를 버리고 일개 신민의 자격으로 정부를 받아들이겠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습니다. 이를 형상화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더 나아가, 왕족이 의병 항쟁에 뛰어들어 ‘신돌석’ 같은 천민 의병장과 조우하게 된다면 얼마나 감동적일까요. 그것이 설사 픽션(허구)이라 하더라도 그 감동은 참 진실하지 않겠습니까.

<필자 소개>

필자 이한수

인성여자 고등학교 국어교사

블로그 http://blog.daum.net/2hansu

이한수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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